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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 글귀 & 대사

끝나지 않는 그런 여름이 어디에도 없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 성당 앞은 언제나 붐빈다 계단을 내려오다 말고 멈춘다 몇 번인가 종소리를 들은 적이 있다 하지만 나는 종탑이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 거대한 종이 움직이는 것을 본 적도 없다 그것은 정말로 거대할까 궁금하지 않고 어디에도 없는 우리들의 슬픔을 위하여 곧 미사가 시작됩니다 그러니 기도하십시오 이 많은 기도를 두고 어디를 디뎌야 한다는 말씀이십니까 기도하십시오 멀리서 매미가 울부짖는다 덥다 너무 덥다 기도하십시오 기도 말고 무엇을 할 수 있겠어요 절룩거리며 지나가는 사내를 보았다 오후처럼 그는 흐리고 느렸다 그의 뒷모습은 그치지 않고 곧 인파 속으로 사라졌다 이 여름이 끝나지 않을 것만 같아서 손으로 이마를 가려보지만 그늘은 생기다가 사라지고 끝나지 않는 그런 여름이 어디에도 없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 유희경, 장마 더보기
헤어지는 법을 모르는 소년을 찾고 있어 사랑하려고 헤어지는 법을 모르는 소년을 찾고 있어 사랑하려고 사탕을 빨아 먹는 아이와 사탕을 깨물어 먹는 아이에 대해 나는 다 알고 있거든 소녀는 말을 거의 하지 않는 줄무니 티셔츠를 좋아하던 아동이었다지 물감만을 바르지는 않겠어요 물의 속성으로 그대로 두세요 고운 색깔로 규정하기를 반복하는 소녀들 속에서 빠져나와 소녀는 과거로 노래한다 아빠가 죽고 엄마가 죽고 나는 죽지 않고 잘도 자라네 행복의 두 페이지는 죽음 상냥한 친구들도 거절할래 선물도 받지 않을래 기쁠 것도 없으니까 슬플 것도 없을 테지 소녀를 등장시키면 소년의 형태가 서서히 드러나는 법 이미 절반의 소년 옆에서 느끼는 girl 돌보는 boy를 만드는 것은 girl의 진리 숟가락 하나를 놓는 것은 끼니를 때우는 일 같지만 숟가락 두 개일 때는 화목한 식.. 더보기
유성우가 떨어지는 밤 너는 내게 몸을 던진다 유성우가 떨어지는 해변에 우리는 나란히 누워 길 잃은 비행사에게 속죄했다 등에서 타닥타닥 별사탕이 터졌다 내 마음이 먼저 끝나게 해 주세요 우리는 각자 다른 신에게 빌었다 폭풍이 우릴 싸 먹었다 깨진 운성 바닷속으로 추락했다 와락 쏟아지는 마음은 오래전에 죽었는데 어떤 별에선 우리가 아직 사랑하고 있다 모래알 같은 사람들은 추모의 집으로 갔는데 나는, 지금 여기 있어 왜 목매달지 않고 살아 있나 살아서 자꾸 마주치나 유성우가 떨어지는 밤 너는 내게 몸을 던진다 드문드문 사랑을 한다 너의 신이 너의 기도를 들어주었다 몸이 깨진 별들이 내게 와 추락한다 죽으려고 손미, 서울, 나 여기 있어 더보기
이번 삶은 천국 가는 길 겪는 긴 멀미인가요 팬티를 벗고 체중계에 올라가는 새벽입니다 그림자도 체중계 밖에서 기다려야 하는 새벽입니다 커다란 제사장이여 커다란 예언자여 이번 삶은 천국 가는 길 겪는 긴 멀미인가요 나를 체중계 위로 떠민 아비와 체중계 뒤 발을 걸친 천사들 덕분에 이곳은 지그시 가라앉고 있습니다 커다란 제사장이여 커다란 예언자여 나는 이리도 우연히 죄와 평행해도 되는 것입니까 주먹 속 일몰과 망토 안에서 기우는 추와 함께 체중계 위에서 저물면 안 되는 일입니까 커다란 심판자여 커다란 심판자여 가볍게만 마시고 흩어지게 하소서 성동혁, 속죄양 더보기
사람들 틈에 끼인 살아 본 적 없는 생을 걷어 내고 싶었다 사람들 틈에 끼인 살아 본 적 없는 생을 걷어 내고 싶었다. 모든 게 잘 보이게 다시 없이 선명하게 난 오늘 공중전화통을 붙잡고 모든 걸 다 고백한다. 죽이고 싶었고 사랑했고 하늘을 나는 새를 보라는 성경 구절에도 마음이 흔들린다고. 그리고 오늘은 목요일. 죽이 끓든 밥이 끓든 나는 변하지 못했고 또 목요일. 형상이 없으면 그림이 아니야. 따귀 한 대에 침 한 번씩 뱉고 밤을 새우면 신을 만날 줄 알았지. 그림 같은 건 잊은 지 오래라는 녀석들 몇 명과 그들의 자존심과 그들의 투항과 술을 마신다. 그중에 내가 있다. 오늘은 목요일. 결국 오늘도 꿈이 피를 말린다. 그 꿈이 나한테 이럴 수가. 허연, 목요일 더보기
물속에 있으면 비를 잊을 수 있다 물속에 있으면 비를 잊을 수 있다 침대도 편지도 없고 마른 것도 없다 몸을 한껏 펼친다 머릿속에서 눅눅한 페이지들이 천천히 녹아내린다 물속은 가득 차 있다 물고기들이 제 몸속으로 음악을 삼키고 있다 배 속에 진회색 구름이 차오른다 물속에는 갈림길이 없다 잠길 수 있다 결빙이 없다 표정처럼, 얼음은 언제나 바깥부터 시작된다 목욕도 없다 가끔 숲이 있다 흔들리는 부드러운 나무들 물속에서는 옷장이 필요 없다 그 사이에서 물고기들은 헐벗거나 먹거나 마신다 말없이 그러나 물고기들은 음악을 풍기고 있다 수면이 얼어붙는 동안에도 풍만한 냄새로 가득 찬 움직이는 음표 물속에서 누군가의 뺨을 때릴 수 있었다면, 상대방이 멈추기로 결심했기 때문에 가능한 음악이 있다 물속에는 식탁이 없다 마주 볼 필요 없다 비명 없이 우리.. 더보기
그날 이후로 너무 푸른 것은 구분할 수 없었다 그날밤, 바다에서 우리가 보았던 것은 해변의 놀이공원, 부모와 아이 하나로 이루어진 현대적 가족, 요란스럽기만 한 불꽃놀이와 어떤 기대 속에서 몸을 붙여 걷던 연인들 "바다 냄새는 죽은 생물들이 내는 냄새래" 그렇게 말하던 너의 살은 푸르고 짠 냄새가 났지 그날 이후로 너무 푸른 것은 구분할 수 없었다 누군가의 발자국을 따라 홀로 걸었다 이제 해변에는 아무도 없구나 바닷가의 텅 빈 유원지, 출렁이는 검은 모래, 죽은 물새떼와 영원히 푸른 달빛 "너를 다시 볼 수 있어서 참 좋다" 네가 말했을 때,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고 눈앞에 펼쳐진 밤과 바다가 구분되지 않았다 그것을 지켜보던 두 사람이 구분되지 않고, 너를 생각하는 이 마음이 무엇인지 구분되지 않는다 해변의 발자국은 끝없이 이어져 있었다 나는 .. 더보기
누구든 외롭다는 말은 나중에 배운다 외국어는 지붕과 함께 배운다. 빗방울처럼. 정교하게. 오늘은 내가 누구입니까? 사망한 사람은 무엇으로 부릅니까? 비가 내리면 낯선 입모양으로 지낸다. 당신은 언제 스스로일까요? 부디 당신의 영혼을 말해주십시오. 지붕은 새와 구름과 의문문 그리고 소년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누구든 외롭다는 말은 나중에 배운다. 시신으로서. 사전도 없이. 당신은 마침내 입술을 가지고 있습니다. 오늘은 매우 반복합니다. 지붕이 빗방울들을 하나하나 깨닫듯이 진심이라는 단어는 언제나 지금 발음한다. 모국어가 없이 태어난 사람의 타오르는 입술로. 나는 시체의 진심에 몰두할 때가 있다. 이상한 입모양을 하고 있다. 이장욱, 오늘은 당신의 진심입니까?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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