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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

그냥 그 순간이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어 기억이란 건 순서에 따라 차곡차곡 쌓이는게 아니야. 만약 그렇다면 오래된 기억들부터 차례로 잊혀지겠지? 그런데 기억들은 언제나 순서를 어기고 뒤죽박죽이 되거든, 그리고 어느 날 갑자기 엉뚱한 곳에서 엉뚱한 기억이 불쑥 솟아 오르는거야. 그것도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순간. 이를테면 꿈 같은 데서 말이야. 그런 걸 아무렇지도 않게 넘길 수 있는 사람은 없어. 그 느낌은 뭐랄까 그래, 마치 멀미 같은 거야. 그 기분알지? 머리가 아프고 멍해지고 세상이 흔들리고, 심장에 커다란 추가 매달려 있는 것처럼 거북해서 토해버리고 싶은데 마음대로 안되고... 그냥 그 순간이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어. 아주 무기력하게. 그냥 울면서. 황경신, 『부주의한 친절』 더보기
우린 아마 기억하지 않아도 늘 생각나는 사람이 될 거야 우린 아마 기억하지 않아도 늘 생각나는 사람이 될 거야 그때마다 난 네가 힘들지 않았으면 좋겠고 내가 이렇게 웃고 있었으면 좋겠어 사랑하는 사람들은 왜 그렇잖아 생각하면 웃고 있거나 울게 되거나 그래서 미안하고 감사하고 그래 사랑해 처음부터 그랬었고 지금도 그래 원태연, 안녕 더보기
나는 인생에 자신이 없어 나는 인생에 자신이 없어. 그래서 가볍게 살고 싶어하는 거야. 난 내 인생을 사소하고 잘게 나누어서 여러 군데에 걸쳐놓고, 그리고 작은 긴장만을 갖고 그 탄성으로 살아갈 거야. 전부를 바쳐서 커다란 것을 얻으려고 하기엔 나는 삶의 두려움을 너무 빨리 알았어. 그리고 어쩌면 그것이 나를 지탱해주는 힘인지도 몰라. 은희경, 『마지막 춤은 나와 함께』 더보기
우리는 따뜻해 죽을 수도 있는 열대어를 취급하는 방식에 관해 이야기할 필요가 있었지 준이치, 그때 우린 궁금해하지 않았지 홀연히 사라지는 재주에 대해서, 서로 단추 없이도 잠기고 라켓도 없이 받아치는 게임을 하면서. 그때 나는 셔틀콕이 걸린 나무가 되어 흔들리고 싶었지 흔들림을 눈여겨봐야 하는 제자리에서 본 우리 얼굴은 지나치게 젊고 초라했어 ​ 오래된 노래에 한 시절을 묻고 멀리 와버렸지 준이치, 너와 내가 열렬했던 음악이 우리의 입술을 베꼈다는 착각에 간주를 아슬아슬하게 반복했지 우리는 어떤 노래와도 어울리지 않아 다만 노래가 될 수 있을 뿐 흥얼거림만으로 설명할 수 있는 채도로, 서로를 물들이고 물드는 게 재난임을 모르고 소복이 내리는 눈, 자발적으로 닫힌 문. 오래된 대만 영화가 시작되고 우리는 자막보다 앞서는 대화를 읊조리고 있었어 이게 다예요 전부였어요 말하지 않는 네게서 많.. 더보기
세계가 무너지는데 그 와중에 잠든 너는 아름답고 무엇을 할까 무엇을 해야 할까 우리는 각자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는 게 좋을지도 모르지 어떻게 해야 할까, 누구도 대답하지 않았지만 눈을 마주치는 것으로 우리의 마지막을 암묵적으로 동의했다 가장 사랑하는 사람과 가장 사랑하는 일을 함께하는 것 너는 나에게 동화를 듣다가 잠에 빠지고 싶다고 말했다 그렇게 잠들면 동화가 꿈으로 펼쳐지고 죽은 영혼은 꿈속에서 영원히 살 수 있을 거라고...... 나는 너의 곁에서 네가 잠들어 있는 영화를 보고 싶다고 말하는 대신, "세계는 무너지지 않을 거라는 거짓말을 할 거야. 그다음 너에게 동화를 들려줄게." 너는 눈을 감았지 그리고 나는 말했다 "하지만 세계가 무너지는 일 따위는 일어나지 않으니까." "정말? 그럼 우리는 내일도 볼 수 있는 거야?" "응. 우리는 내일도 .. 더보기
내가 죽으면 어떨 것 같애 내가 죽으면 어떨 것 같애 발이 땅에서 떨어지는 순간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 그때 우리는 여러 가지 모양으로 넘어졌다 어떻게 끝내는 게 가장 아름다울지 죽어본 적이 있는 사람처럼 마지막 자세를 고민했다 ​ 번갈아 가며 추락하다가 허공에서 눈이 마주치면 웃었지 한 번도 같은 곳을 바라보며 우와, 동시에 탄성을 지른적은 없었지만 ​ 집에 갈 시간이야 중력 속으로 내려왔을 때 서로의 몸에서 반짝이는 정전기를 보며 예쁘다, 동시에 생각했을 거다 너를 생각하는 기분은 물고기처럼 튀어 오르다 사라지는 아득하고 선명한 감정 ​ 엄마가 죽으면 어떡하지 외갓집에서 키우던 개가 죽으면 죽으면서 내 생각이라도 한다면 ​ 잊을만하면 네 꿈속에서 죽는 게 내 안부다 백인경, 트램폴린 더보기
사실은, 죽어버린 것들이 세상에서 제일 예뻐 누가 온다고 한 것처럼 냄비를 데우고 칫솔을 샀다 너는 떠나기 전 양치질을 하는 습관이 있고 매운 치약을 다 삼키고 엄살을 부리는 건 내 몫이었지 뱉어놓은 침 모양대로 아스팔트에 얼룩이 졌다 집 밖의 일은 늘 모호했지만 1월의 방아깨비나 내가 버린 고양이처럼 사실은, 죽어버린 것들이 세상에서 제일 예뻐 나는 네 앞에서 박하를 띄운 청산가리를 흔든다 이를 닦으면 잠을 자거나 하루를 더 살아야 한다 오래된 잇자국이 선연한 너의 살갗 언니, 뭐라고 하는지 잘 모르겠어요 입술이 오므라들어서 네가 나를 못 알아볼 것 같다 익숙한 자음들이 흩어졌다 알파벳의 세계로 너는 외로워 보이는데 나는 이제 시를 안 써 그래도 여기는 네 사랑니가 있는 곳 그러니 서울 오면 연락해 백인경, 서울 오면 연락해 더보기
살아 있긴 한 건가 썩은 달이 지고 징그러운 아침이야, 애인아. 바람을 신으로 모신 버드나무가 미동도 않고 신을 기다리고 쓰레기봉투를 쪼던 까치는 포클레인에 앉아 꽁지를 까닥거리고 있어. 단추알만한 까치의 눈 속에서 번뜩이는 건 그래, 벌레 같은 여름 태양이야. 난 아침이면 이런 생각을 해. 이마에서 수십 개의 뿔이 돋아도 즐겁다, 즐거워야 한다, 뭐 이런…… 안심해. 미치지 않았어. 최소한 네 앞에서는. 피곤할수록 눈동자가 살아나. 너에게서조차 위로의 속삭임이 오지 않으니 난 자주 눈알을 뽑아버리고 싶어. 거울을 빠개는 태양. 뽑지 않아도 저절로 눈알이 녹을 거야. 태양을 떨어뜨리고 싶어. 내 머릿속에 손을 넣어줘. 물파스를 발라줘. 부탁인데 입은 좀 다물어줘. 난 열린 문으로는 들어가고 싶지 않아. 난 순한 것은 즐기지..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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