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728x90

시 & 글귀 & 대사

처음인 것들이 맨 나중을 설명하는 그곳에 고래가 있었다 붉은 장미*의 기억을 끝으로 바다를 접는 고래. 붉은, 호흡을 꺼내 구름을 탁본한다 자신이 끌고 다닌 하루의 기록을 찾아보지만 탁본 속에는 주어도 서술어도 생략된 비문(非文)만 가득하다 겨우 찾아낸 꽃잎 문양 수의를 혼자 입기 어려워서 꼬리를 들썩이다가 눈동자 속 파도를 꺼내 보다가 바람이 뜯어먹던 발자국을 지나고 백사장이 구워낸 해당화 그늘을 기웃대며 간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것들을 이정표 삼아 아는 길을 가듯 간다 쓰러진 채로 고개 끄덕이는 몸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어 자꾸만 돌아보며 바다 쪽으로 길을 잡는다 끼니를 잊은 철학자처럼 느릿느릿 잠 속으로 빠져드는 고래 낯익은 물결을 만났을까 잠깐 웃음이 스친 듯도 한데 몸속에 남아 있던 바다가 쿨럭, 외마디를 내뱉는다 제 몸에서 나오는 뜻밖의 비명에.. 더보기
깊은 어느 모서리에서 자란 달에 레몬 냄새가 나서 내 볼은 떨린다 당신의 눈 속에 가끔 달이 뜰 때도 있었다 여름은 연인의 집에 들르느라 서두르던 태양처럼 짧았다 당신이 있던 그 봄 가을 겨울, 당신과 나는 한 번도 노래를 한 적이 없다 우리의 계절은 여름이었다 시퍼런 빛들이 무작위로 내 이마를 짓이겼다 그리고 나는 한 번도 당신의 잠을 포옹하지 못했다 다만 더운 김을 뿜으며 비가 지나가고 천둥도 가끔 와서 냇물은 사랑니 나던 청춘처럼 앓았다 가난하고도 즐거워 오랫동안 마음의 파랑 같을 점심식사를 나누던 빛 속, 누군가 그 점심에 우리의 불우한 미래를 예언했다 우린 살짝 웃으며 대답했다, 우린 그냥 우리의 가슴이에요 불우해도 우리의 식사는 언제나 가득했다 예언은 개나 물어가라지, 우리의 현재는 나비처럼 충분했고 영영 돌아오지 않을 것처럼 그리고 곧 사라질만큼 아름다웠다.. 더보기
그 애의 소원속에 나도 있었으면 “그날밤 유성을보며 빌었던 소원은 그 애의 소원속에 나도 있었으면 하는것이다.” 영화 나의 소녀시대 中 더보기
여름까지 살아 있자고 생각했다 죽으려고 했다. 올 설날, 옷 한 벌을 받았다. 설빔으로. 옷감은 삼베였다. 잔 줄무늬가 있는 쥐색 옷이었다. 여름에 입는 옷일 것이다. 여름까지 살아 있자고 생각했다. 다자이 오사무, 『만년』 더보기
부끄럼 많은 생애를 보냈습니다 부끄럼 많은 생애를 보냈습니다. 저는 인간의 삶이라는 것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다자이 오사무,『인간실격』 더보기
코끼리는 마음이 너무 아프면 죽을 수 있다고 말하던 너의 입술을 본다 빛이 새어든다. 너를 본다. 너를 비추는 햇빛을 본다. 너의 어깨 너머로 흐르는 구름을 본다. 구름 속 석양을 본다. 석양 속 코끼리 무리를 본다. 너를 본다. 너의 눈동자 속에 비친 내 얼굴을 본다. 그림 안과 밖에서 서로를 마주 보는 심정으로 너를 본다. 우리의 간격을 본다. 네 얼굴을 만진다. 형상은 온기로 잡힌다. 한 번도 부화한 적 없는 심장을 품고 너를 만진다. 잠든 너의 심장을 본다. 거대한 것들의 죽음은 거대해서 작은 것들의 죽음은 작아서 슬프다. 코끼리는 마음이 너무 아프면 죽을 수 있다고 말하던 너의 입술을 본다. 나는 슬픔 속에 죽어가는 코끼리를 본 적 없지만 너를 통과해 빠져나가는 붉은 코끼리를 본다. 그 코끼리가 너의 그림자를, 나의 그림자를 지고 멀어져 가는 것을 본다. 너를 본.. 더보기
네가 나의 마지막 여름 장미였지 스마트폰이 점령한 서울 젊음의 거리에 늦게 핀 여름 장미 21세기의 먼지를 뒤집어쓴 채 나, 여기 살아 있다고...... 장미넝쿨이 올라온 담벼락에 기대어 소나기 같은 키스를 퍼붓던 너. 네가 나의 마지막 여름 장미였지 아니, 가을이었나? 네가 선물한 서른 송이의 장미. 천천히 말려 죽여야 더 오래간다며 우리의 침대 위에 걸어둔 장미꽃들은 어디로 갔나 침대가 작다고 투덜대는 내게 너는 속삭였지 사랑하면 칼날 위에서도 잘 수 있어 최영미, 마지막 여름 장미 더보기
너의 무기력을 사랑해 너의 허스키를 사랑해, 너의 스키니한 몸을 사랑해, 너의 가벼운 주머니와 식욕 없음을 사랑해, 너의 무기력을 사랑해, 너의 허무를 사랑해, 너의 내일 없음을 사랑해. 김금희, 『너무 한낮의 연애』 더보기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