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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불행을 모조리 팔아 찰나의 행복을 사는 일이 사랑이기도 했다 너는 내가 없다고 세상이 엎어지거나 외로워지거나 사무치지 않겠지만, 나는 네가 없는 작은 순간에도 땅과 하늘이 구분되지 않았다. 안경을 벗고 보는 것처럼 모든 세상의 경계가 흐드러졌다. 와중에도 너 하나만 선명해서 깊이 외로웠다. 너를 만나 내 사랑은 자주 울었지만, 더 환하게 웃기도 했다. 사랑이 하는 일 열 가지 중 아홉이 슬프다면, 하나가 기뻤다. 내 불행을 모조리 팔아 찰나의 행복을 사는 일이 사랑이기도 했다. 백가희, 사랑의 일 더보기
내 사랑이 멸종되게 해 주세요 너무 소중해서 가끔은 꺼내보고 지켜보기만 해도 좋은 사랑해 좋아해 너밖에 없어 같은 말들은 다 단순하고 지겹고 허무맹랑하게 들릴까 봐 더욱 극단적이고 귀 안에 틀어박혀 빠져나오지 않는 말들을 쓰고 싶었다 마치 태초의 언어처럼 태어나자마자 들은 말처럼 그러니까 오늘은 나를 죽여도 돼 멸종하는 동물 대신 내 사랑이 멸종되게 해 주세요 상현, 허영 中 더보기
인간을 무너뜨리는 가장 좋은 방법 인간을 무너뜨리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 사람의 일부가 되는 것 그리고는 사라지는 것 박가람, 젠가 더보기
왜 죽고 싶은 기분을 기침처럼 숨길 수가 없나 왜 죽음은 발작처럼 예고도 없이 다가오나 왜 죽고 싶은 기분을 기침처럼 숨길 수가 없나 탕, 탕, 탕 꽃망울이 하늘을 향해 고개를 치들어 터지는데 꽃가루가 총알이라 나는 봄볕에 죽음을 갈망하나 그래 꽃가루가 총알이라서 숨을 쉴 때 마다 폐에 커다란 구멍이 뚫렸나 봄은 따뜻한데 나 혼자가 춥다 꽁꽁 언 피부가 염산 처럼 볕에 녹는다 봄햇살에 녹는 것을 보면 나는 눈사람이었나 누가 나를 뭉 쳤 나 장예본, 녹 더보기
내가 죽으면 박제를 해줘 유리병 속에 목소리들. 텅 빈 공중을 울리며 달아나고 있었지 푸른색 이마를 유리벽에 박으며. 무거운 피가 뚝뚝 떨어질 때까지. 이곳에 남은 것은 지치고 늙은 성정들뿐. 동전을 하나씩 흘리며 자신의 주머니를 털어내는 동안. 우리에게 남은 건 보잘 것 없는 슬픔뿐. 내가 죽으면 박제를 해줘. 슬픔도 기쁨도 없이 당신의 방에서 정적만을 먹고 살찌도록. 사람들이 손을 흔든다. 떠나지 못하는 자들과 돌아오지 않는 자들 사이에서. 겨울은 지겹도록 계속되었다. 손가락으로 십자가를 가리키던 동생은 왜 그런 얼굴을 하고 있었을까. 유리병이 굴러간다. 굴러간다. 굴러간다. 이곳에 물이 마르고 있어. 산 사람의 이름에 빨간 줄을 그으며. 박은정, 수색(水色) 더보기
여름 기억나지 않는다 얼어가는 사람을 끌어안는다 기억나지 않는다 너무나 아름다운 얼어가는 사람들은 아름다움만 보여주었다 예감에 휩싸였던 시간 정말 신비였을까 검은 길을 걷는다 그와 함께 걷는다 단단하고 축축한 밤공기 텅 빈 그림자새 기억나지 않는다 멀리 있는 것들이 되살아난다 무슨 계절을 좋아하는지 물었다 여름 죽음처럼 분명해지는 것이 있었다 너와 나의 아름다움이 같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해도 아름다운 것이 있었다 박지혜, 여름 더보기
조용한 삶이란 건강한 사람들의 종교라고 생각했다 무얼까 멋있는 포스터를 사서 방에 걸어 두는 건 조명이 하나 둘씩 떨어지면 많은 의자가 빛나니까 단지 그것 때문에 공연을 보러간다. 내겐 의자에 앉아도 반짝반짝할 자유가 필요해서 사람들이 많고 모두 말이 없다. 믿는 것일까 아름다운 점으로 가득한 귓속을 나는 벌레 같아서 어깨와 팔꿈치처럼 도드라진 곳에는 격자무늬가 남을 거라고 생각했다. 조용한 삶이란 건강한 사람들의 종교라고 생각했다. 헤드라이트와 수은등이 위로만 손 뻗는 이유를 알고 있다고 생각 했다. 그것을 믿어 주는 사람은 절대 다수에게 사랑받아도 질투하지 않겠다고 나는 편협하여 기울어지는 방향으로 아침이 밝는다고 생각했다. 사람들이 나란히 눈을 떳다. 콘서트에 가면 소중한 몸이 구르는 소리가 들렸다. 가슴 아래서 흰 뼈를 붙잡고 있는 이들을 보았.. 더보기
사랑해, 좋아 같은 말은 죽어도 입에 안 익지 어제는 해가 뜨지 않았다 네 소원이 이루어졌다고 언니가 말했다 기쁘지는 않았다 내 소원은 항상 차선책이었다 우리는 이 신기한 일에 대하여 일기를 쓴다 나는 문장을 쓰고 언니는 그것을 소리내지 않고 읽는다 말하면 사라지는 문장을 우리는 알고 있다 오늘은 힘든 일이 많았고 여전히 물과 잠은 달다 사랑하는 사람들로부터 나는 안전하다 배고파, 추워 같은 말을 무심코 하기는 싫어 사랑해, 좋아 같은 말은 죽어도 입에 안 익지 우리도 안다 매일매일은 사랑할 수 없지 눈을 뜨면 더이상 눈뜨지 않아도 된다 부리 없는 새처럼 언니가 조용히 말한다 밤을 보내고 나면 많은 것을 잊어버리지만 내가 밤이 되면 밤에 일어나는 일들을 소유할 수 있어 새는 새의 영역에서 죽거나 살지 검은 눈꺼풀을 바라보며 나는 쓴다 몸에 일어나는 ..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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