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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가수의 노래만 듣는다 죽은 가수의 노래만 듣는다. 노래는 죽은 사람의 것이 제맛이지. 너는 살아 있어서 목소리가 심심해. 모서리에 서서 술을 마셨지. 토할 것처럼. 죽음에 전염될 수 있지 않을까. 죽은 자들은 노래를 잘해. 노래에서 좋은 냄새가 나지. 클럽에 머리를 두고 왔다. 그걸 찾으러 가야 하는데. 죽은 가수의 노래가 넘치는 곳. 정육점에 거꾸로 걸린 토끼 머리. 크레타의 정육점에는 노래가 있지. 너는 살아 있어서 노래를 못해. 살아 있는 자들에게 노래를 시키지 마. 나는 토끼처럼 뛰었지. 죽은 가수의 노래만 듣자. 한 번 듣자. 또 한 번 듣자. 모서리에 서서. 악보를 펼친다. 클럽에 머리를 두고 왔으니 노래는 뚝뚝 흐르지. 저녁이 오고 있어. 붉은 노래처럼 저녁이 온다. 노래는 전시되는 나의 것이 제맛이지. 너는 살.. 더보기
이것이 너의 슬픔이구나 이 딱딱한 것이 이것이 너의 슬픔이구나 이 딱딱한 것이 가끔 너를 안으며 생각한다. 이것은 플라스틱이다. 몸의 안쪽을 열 때마다 딱딱해지는 슬프고 아름다운 플라스틱 하지만 네가 부엉이라고 말해서 나는 운다. 피와 부엉이 그런 것은 불가능한 슬픔 종이와 철사 인디언보다 부드러운 것 그런 것을 떠올리면 슬픔은 가능하다. 지금은 따뜻한 저녁밥을 생각한다. 손으로 밥그릇을 만져보는 일은 부엉이를 더듬는 일 불가능한 감각 상처에 빨간 머큐로크롬을 바르고 너를 안으면 철사와 부엉이가 태어난다. 철사로 너를 사랑할 수 있다. 종이에서 흰 것을 뽑아내는 투석 그러나 너를 안으며 생각한다. 이것이 플라스틱이다. 다른 몸을 만질 때 슬픔이 가능해지는 불가능한 플라스틱. 이성민, 불가능한 플라스틱 더보기
사랑을 호명할 때 우리는 거기에 없었다 月, 당신은 장을 보러 나갔다 잘게 썰린 해파리를 사와서 찬물로 씻었다 베란다에선 파꽃이 피었고 달팽이는 그 위에 둥글게 앉아 있었다 火, 당신은 나를 차마 깨우지 못했다 똬리를 틀고 잠든 나의 테두리를 동그랗게 에워싸며 조용히 다가와 다시 누웠다 水, 당신은 기차를 탔다 덜컹이기 위해서 창문에 이마를 대고 매몰차게 지나가는 바깥풍경을 바라보기 위해서 나는 옥상에 의자를 내놓고 앉아 있었다 눈을 감고 귀를 깃발처럼 높이 매달았다 여린 기차 소리가 들렸다 木, 사랑을 호명할 때 우리는 거기에 없었다 서로가 서로에게 사나운 짐승이 되어 있었다 동시에 서로가 서로에게 초식동물이 되어 있었다 두려움에 떨었다 당신의 떨림과 나의 떨림 사이에서 시뻘건 피가 흘렀다 우리가 나누었던 대화들이 응혈처럼 물컹 만져졌다 金.. 더보기
일몰을 믿지 않는다 전화기가 꺼져 있다 꺼진 그의 마음을 캐묻는 대신 소매 끝으로 전동차의 유리창을 닦는다 팔이 접혀지는 안쪽에 통증이 살아난다 눈이 큰 짐승의 몸에서 떨어져 나온 일부처럼 여름 저녁의 짧은 철로는 윤곽이 뚜렷하다 저녁 여섯 시 오렌지 빛 잔광 속에 물끄러미 있다 찻물 끓이는 주전자가 엎질러진 오래 전 저녁 팔뚝 안쪽의 눈꽃 무늬 상흔은 저 절단된, 단절된 협궤열차의 팔뚝에 그리고 목요일의 오후에 걸쳐져 있다 금속성의 이가 시린 그것 내게 질문을 하고 싶다 아직도 사랑을 꿈꿔? 사람들은 일제히 가마우지 떼처럼 수면 가까이 유리창 가까이 붙어 서서 일몰을 내다보고 있다 뒷모습에 너무 많은 표정이 담긴 자를 믿지 않는다 일몰을 믿지 않는다 그저 사라지고 나는 물끄러미 있다 권현형, 일몰을 믿을 수 없다 더보기
늦봄의 바람이고 싶었다 나는 네 방에 음악을 불어넣는 늦봄의 바람이고 싶었다 그런데 수은 얼음 알갱이의 눈보라로 네 방을 질척질척 얼리고 있다 정신을 차리고 보면 나도 내가 춥다 영영 끝날 것 같지 않은 황폐함 피로, 암울, 막막, 사납게 추위가 삶을 얼려 비트는 황폐함 그러면서도 질기게도 죽을 것 같지 않은 황폐함 모르는 별로 너 혼자 추방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네 영혼을 뒤쫓는 것이 수은 얼음 알갱이의 눈보라라면? 아, 나는 네 영혼에 음악을 불어넣는 늦봄의 포근한 바람이고 싶었다 사실 나는 죽었는지 모른다 황인숙, 겨울밤 더보기
잠이 외면이라고 생각하니 너의 불면증을 생각하면 마음이 찢어지는 것 같다 잠이 외면이라고 생각하니 너의 불면증을 생각하면 마음이 찢어지는 것 같다. 그런 너의 불안함을 외면하는 사람들이랑 놀지 말았으면 좋겠다. 여기 아무도 안 오고 너만 왔으면 좋겠다. 김승일, 『1월의 책』 더보기
우리는 깊고 부서지기 쉬운 우리를 밟으면 사랑에 빠지리 물결처럼 우리는 깊고 부서지기 쉬운 시간은 언제나 한가운데처럼 김행숙, 인간의 시간 더보기
내 가보지 않은 한쪽 바다는 늘 마음속에서나 파도치고 있습니다 ​ 아직 서해엔 가보지 않앗습니다. 어쩌면 당신이 거기 계실지 모르겠기에, 그곳 바다인들 여느 바다와 다를까요. 검은 개펄에 작은 게들이 구멍 속을 들락거리고 언제나 바다는 멀리서 진펄에 몸을 뒤척이겠지요. 당신이 계실 자리를 위해 가보지 않은 곳을 남겨두어야 할까봅니다. 내 다 가보면 당신 계실 곳이 남지 않을 것이기에. 내 가보지 않은 한쪽 바다는 늘 마음속에서나 파도치고 있습니다. 이성복, 서해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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