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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 않아도 무언가를 잃는 것이 버거운 나이였다 그렇지 않아도 무언가를 잃는 것이 버거운 나이였다. 온 힘을 다해 아파하고 온종일 집중해서 성심성의껏 비관할 수 있는 몹쓸 젊음 때문이었다. 모든 것을 다해 사랑하기로 한 사람이 사라진 날, 심장이 뛰는 순간순간마다 안으로 돋친 가시가 1밀리씩 자라났다. 안으로 자라는 외골격에 갇힌 채 껍질이 강요하는 모양대로 간신히 서서 비틀거리던 삶. 배명훈, 『미래과거시제』 더보기
지구 한끝에서 누군가 어깨를 들썩이며 울고 있기 때문이라고 바람이 불지 않아도 무사히 이파리들이 떨어져내렸다. 어떤 시인이었던가, 바람이 불지 않아도 낙엽이 떨어지는 건, 지구 한끝에서 누군가 어깨를 들썩이며 울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별들의 들판, 공지영 더보기
왜냐하면, 당신은 언젠가 반드시 나를 버릴 테니까 왜냐하면, 당신은 언젠가 반드시 나를 버릴 테니까. 내가 가장 약하고 도움이 필요할 때, 돌이킬 수 없이 서늘하게 등을 돌릴 테니까. 그걸 나는 투명하게 알고 있으니까. 그걸 알기 전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되었으니까. 흰, 한강 더보기
여기가 아닌 다른 곳으로 가고 싶다 이것이 아닌 다른 것을 갖고 싶다. 여기가 아닌 다른 곳으로 가고 싶다. 괴로움 외로움 그리움 내 청춘의 영원한 트라이앵글. 최승자, 내 청춘의 영원한 더보기
덜 망가진 채로 가고 싶다 죽을 때 죽는다는 걸 알 수 있어? 죽으면 어디로 가는 거야? 죽을 때 모습 그대로 죽는 거야? 죽어서도 엄마는 내 엄마야? 때를 가늠하는 나무의 말로 여섯 살 딸이 묻다가 울었다 입맞춤이 싫증나도 사랑은 사랑일까 반성하지 않는 죄도 죄일까 깨지 않아도 아침은 아침일까 나는 나로부터 도망칠 수 있을까 흐름을 가늠하는 물의 말로 마흔 넷의 나는 시에게 묻곤 했다 덜 망가진 채로 가고 싶다 더 이상 빚도 없고 이자도 없다 죽어서야 기억되는 법이다 이젠 너희들이 나를 사는 거다 어둠을 가늠하는 속 깊은 흙의 말로 여든 다섯에 아버지는 그리 묻히셨다 바닥을 향해 피는 상수리 꽃을 마주하여 젖은 물살을 저어가는 지느러미뼈를 마주하여 흙에서 깨어나는 달팽이 촉수를 마주하여 고스란히 제 짐 지고 제 집에 들어앉듯 다.. 더보기
나는 이 여름을 죽도록 좋아한다 여름이 아닌 것들을 좋아한다 그러니까 얼어붙은 강,누군가와 마주 잡은 손의 온기, 창문을 꼭꼭 닫아 놓고서 누운 밤, 쟁반 가득 쌓인 귤껍질들이 말라 가는 것을 좋아한다 여름은 창을 열고 나를 눅눅하게 만들기를 좋아한다 물이끼처럼 자꾸 방 안에 자라는 냄새들이, 귤 알갱이처럼 똑똑 씹히는 말들이 혓바닥에서 미끄러진다 곰이 그 위에 누워 있다 동물원 우리에 갇힌 곰이, 수박을 우걱우걱 먹어 치우던 곰이 나를 쳐다본다 곰에게서 침 범벅의 수박 물이 떨어진다 여기가 동물원이 아니라 내 방이라는 것을 알아 갈 때쯤, 나는 혼자 남아 8월을 벗어난다 그러니까 수박이 아닌 것들을 좋아한다 차가운 방바닥에 눕는 것을 좋아한다 피가 나도록 긁는 것을 좋아한다 좋아한다는 것들이 땀띠처럼 늘어난다 그러니까 나는 이 여름을.. 더보기
사랑해도 혼나지 않는 꿈이었다 쌀을 씻다가 창밖을 봤다 숲으로 이어지는 길이었다 그 사람이 들어갔다 나오지 않았다 엣날 일이다 저녁에는 저녁을 먹어야지 아침에는 아침을 먹고 밤에는 눈을 감았다 사랑해도 혼나지 않는 꿈이었다 황인찬, 무화과 숲 더보기
사랑해, 네 눈물이 지하수를 타고 올 만큼 날 사랑해 줘 가끔 너를 찾아 땅속으로 내려가기도 했단다 저 침침하고도 축축한 땅속에서 시간의 가장자리에만 머물러 있던 너를 찾으려 했지 땅속으로 내려갈수록 저 뿌리들 좀 봐, 땅에는 어쩌면 저렇게도 식물의 어머니들이 작은 신경줄처럼 설켜서 아리따운 보석들을 빨랫줄에 걸어두는데 저 얇은 시간의 막을 통과한 루비나 사파이어 같은 것들이 땅이 흘린 눈물을 받은 양 저렇게 빛나잖아 가끔 너를 찾아 땅속으로 내려가기도 했단다 사랑 아니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세월 속으로 가고 싶어서 머리를 지하수에 집어넣고 유리처럼 선명한 두통을 다스리고 싶었지 네 눈에 눈물이 가득할 때 땅은 속으로 그 많은 지하수를 머금고 얼마나 울고 싶어 하나 대양에는 저렇게 많은 물들이 지구의 허리를 보듬고 안고 있나 어쩌면 네가 밤 속에 누워 녹아갈 때..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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