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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 글귀 & 대사

돌아오지 않는 것들은 언제까지 돌아오지 않는 것들일까 ​ 그 시절 나는 잘 말린 무화과나무 열매처럼 다락방 창틀 위에 조용히 놓여 있었다. 장례식 종이 울리고 비둘기 날아오를 때 불구경 간 엄마는 돌아오지 않았다. 오빠는 일 년 내내 방학. 조울을 앓는 그의 그림자는 길어졌다 짧아졌다 짧아졌다 길어졌다. 넌 아직 어려서 말해 줘도 모를 거야. 내 손바닥 위로 무화과나무 열매 두 개를 떨어뜨리고 오빠도 떠나갔다. 기다리지도 않는데 기다리는 사람이 되는 일은 무료한 휴일 한낮의 천장 모서리같이 아득했다. 오빠가 떠나간 남겨진 다락방은 내 혼잣말이 되었다. 열려진 창밖으로 끝없는 바다. 밤낮 없이 울고 있는 파도. 주인을 잃은 마호가니 책상 위에는 연두 보라 자주 녹두 색색 종이테이프 지우개 연필 증오 수줍음 비밀 비밀들. 도르르 어둠의 귓바퀴를 감아 넣듯 파랑.. 더보기
여름 팔월은 참 짙고 아득해서 나는 그렇게 있다 여름 팔월은 참 짙고 아득해서 나는 그렇게 있다 이곳엔 볕이 너무 많아 귀하지 않지 다리를 떨면서 다리를 떠는군 생각하면서 나는 아무 건물 아무 이 층 아무 사무실 아무 창문 위에서 볼 수 있는 아무 블라인드와 같은, 여름 팔월의 볕 구석에 매달린 흔하고 틈 많은 사연을 내리며 있다 조금 어두워졌다고 믿는다 나는 조금 어두워졌고 시원해졌다는 믿음 아래 있다 잠자코 검은 양산 하나를 펼쳐 나눠 쓰고 걸어가는 여자들을 본다 여름 팔월은 아랑곳없이 나무 그늘 아래를 지나가듯 걸어가는 그들을 본다 그들을 보고 있던 그런 내가 병과 주의와 주장과 그것들의 크기 그런 것들의 자취 그들의 미래와 후회에 대해 떠들어대듯 여름 팔월, 블라인드처럼 드리워놓은 사연들 속 그 덕분에 조금 어두워지고 시원해진 그 속에서 모든 .. 더보기
언젠가 나는 너였을 것이다 언젠가 인간은 천사였던 적이 있지 않을까. 너의 날개 뼈를 만지면서. 폭약이 누군가의 마음을 뒤흔드는 새벽. 너는 붓을 적시며 말한다. 악마도, 이 세상의 조류도 모두 날개 뼈를 갖고 있다고. 종이가 되길 원한 나무는 너로 인해 하나의 그림이 되어가는 중인데. 어느 신화에 따르면 태양과 달을 신의 눈동자라 믿었다고 한다. 그러나 어느 짐승의 두 눈일지도. 전생에 우리는 꽃이었을지도 몰라. 나는 너의 머리칼을 쓸어 모으면서. 아니. 나는 물이었을 거야. 물을 만질 때마다 불안이 전부 씻겨 내려가거든. 폭약이 우리 불안을 뒤흔드는 새벽. 네가 그린 꽃은 호수에서 목을 적시고 있었다. 짐승의 등 위로 나뭇잎이 돋아나고. 인간은 누군가를 죽이기 위해 불을 만들고 불은 누군가를 죽이기 위해 재를 만든다. 재는 무.. 더보기
지독하게 우는 내가 무섭니 그 노래가 좋았다 쏟아질 듯 쏟아지지 않고 뒤엉키고 마는 벌레를 죽이는데 이유 따윈 생각하지 않았다 지독하게 우는 내가 무섭니 입술을 뜯으며 신경질적으로 왔던 길을 돌아보면 불길한 돌들이 늘어났다 반복되는 전주 반복되는 선율 이곳은 더욱 나빠지고 있다 자장가를 듣는 아이는 왜 그런 얼굴을 하고 있을까 모두들 발도 없이 골목을 회전하고 있구나 너의 뒤에 한 사람이 있어 우울은 새벽 사이로 안개는 환희 너머로 시간이 흐를수록 세계는 무심해진다 박은정, 우울과 환희 더보기
고요를 알기 위해선 나의 고요를 다 써버려야 한다고 너의 말이 진짜라는 것을 믿고 싶지 않았다. 사람들이 아름답다고 하는 것에 마음이 간 적 없었다. 고요를 알기 위해선 나의 고요를 다 써버려야 한다고. 가두어둔 물, 멈춰 있는 몸. 움직이지 않는 손가락. 버티기 위해선 버틸 만한 곳이 필요했다. 눈동자가 흔들릴 때. 몸은 더 크게 흔들린다. 중심을 잡기 위해 비틀리는 몸짓. 거울이 나를 도와주진 않는다. 노크하기 직전의 마음을. 울 수 없는 마음을. 나는 불 꺼진 창을 본다. 안미옥, 불 꺼진 고백 더보기
나는 너를 먹을 거야 나는 너를 먹을 거야. 너를 먹고 아주 오랫동안 살아남을 거야. 우리를 사람 취급 안 하던 괴물 같은 놈들이 모조리 늙어죽고 병들어 죽고 버림 받아 죽고 그 주검이 산산이 흩어져 이 땅에서 완전히 사라진 다음에도, 나는 살아 있을 거야. 죽은 너와 끝까지 살아남아 내가 죽어야 너도 죽게 만들 거야. 너를 따라 죽는 게 아니라 나를 따라 죽게 만들 거야. 네가 사라지도록 두고 보진 않을 거야. 살아남을 거야. 살아서 너를 기억할 거야. 최진영, 『구의 증명』 더보기
과거의 그런 사소한 일들이 지금의 우리를 만드는거야 “ 만일 그때 할아버지가 필사적으로 헤엄치지않았다면... 할머니가 일부러 천천히 걷지않았다면 지금의 우린 존재하지않았을거야. 과거의 그런 사소한 일들이 지금의 우리를 만드는거야.” 영화 미래의 미라이 中 더보기
사는 게 그런게 아니라고 누구도 말해주지 않는 밤 누군가 내게 주고 간 사는게 그런 거지 라는 놈을 잡아와 사지를 찢어 골목에 버렸다. 세상은 조용했고, 물론 나는 침착했다. 너무도 침착해서 누구도 내가 그런 짓을 했으리라고는 짐작도 못할 것이다. 그 후로도 나는 사는 게 그런 거지 라는 놈을 보는 족족 잡아다 죽였다. 사는 게 그런거지라고 말하는 이의 표정을 기억한다. 떠나는 기차 뒤로 우수수 남은 말들처럼, 바람 같은. 하지만 그런 알량한 위로의 날들에 속아주고 싶은 밤이 오면 나는 또 내 우울의 깊이를 가늠하지 못하고 골목을 걷는다. 버려진 말들은 여름 속으로 숨었거나 누군가의 가슴에서 다시 뭉게구름으로 피어오르고 있을지 모른다. 고양이도 개도 물어가지 않았던 말의 죽음은 가로등이 켜졌다 꺼졌다 할 때마다 살았다 죽었다 한다. 사는 게 그런게 아니..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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