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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장미*의 기억을 끝으로 바다를 접는 고래.
붉은, 호흡을 꺼내 구름을 탁본한다
자신이 끌고 다닌 하루의 기록을 찾아보지만 탁본 속에는
주어도 서술어도 생략된 비문(非文)만 가득하다
겨우 찾아낸 꽃잎 문양 수의를 혼자 입기 어려워서
꼬리를 들썩이다가 눈동자 속 파도를 꺼내 보다가
바람이 뜯어먹던 발자국을 지나고 백사장이 구워낸 해당화 그늘을 기웃대며
간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것들을 이정표 삼아 아는 길을 가듯 간다
쓰러진 채로 고개 끄덕이는 몸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어
자꾸만 돌아보며 바다 쪽으로 길을 잡는다
끼니를 잊은 철학자처럼 느릿느릿 잠 속으로 빠져드는 고래
낯익은 물결을 만났을까 잠깐 웃음이 스친 듯도 한데
몸속에 남아 있던 바다가 쿨럭, 외마디를 내뱉는다
제 몸에서 나오는 뜻밖의 비명에 놀란 잔등이 푸르르 떨린다
물의 기록이 겹겹이 쌓인 몸속 제 그림자의 그늘이 깊어 몸살을 앓던 중이었거나
다만, 쉴 곳을 찾던 중이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뱃전을 따라 낯선 길을 나서려는 중이었는지도 모른다
오래 꿈꾸던 어둠 속으로 스르르 빨려 들어가는 제 몸이
신기하다는 듯 믿을 수 없다는 듯 몇 번이고 머리를 흔들어 보는데
너무 멀어, 바다는 고래를 알아보지도 못하고
어디서 실컷 싸우다 온 사람처럼 목이 콱 잠긴 오후
처음인 것들이 맨 나중을 설명하는 그곳에
고래가 있었다
* 붉은 장미 : 죽음의 순간 고래의 숨구멍으로 치솟는 핏물을 부르는 선원들의 말.
박미라, 고래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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