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 글귀 & 대사 썸네일형 리스트형 돌이킬 수 있는 일 따위 애당초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 짙은 코트 자락을 흩날리며 말없이 떠나간 밤을 이제는 이해한다 시간의 굽은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볼수록 이해할 수 없는 일, 그런 일이 하나 둘 사라지는 것 사소한 사라짐으로 영원의 단추는 채워지고 마는 것 이 또한 이해할 수 있다 돌이킬 수 없는 건 누군가의 마음이 아니라 돌이킬 수 있는 일 따위 애당초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 잠시 가슴을 두드려본다 아무도 살지 않는 행성에 노크를 하듯 검은 하늘 촘촘히 후회가 반짝일 때 그때가 아름다웠노라고, 하늘로 손을 뻗어 빗나간 별자리를 되짚어 볼 때 서로의 멍든 표정을 어루만지며 우리는 곤히 낡아갈 수도 있었다 이 모든 걸 알고도 밤은 갔다 그렇게 가고도 아침은 왜 끝끝내 소식이 없었는지 이제는 이해한다 그만 다 이해한다 박소란, 푸른 밤 더보기 결국 하거나 하지않거나 상관없는 말들 저도 고맙습니다 서로 진심없이 하는 말이므로 알아듣지 못한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어차피 반갑고, 고맙고, 사랑하거나 미안해하다가도 헤어지고 또 그 말은 되풀이 될 것이었다 어쩌면 인간의 역사는 대부분 이런 말들로 흘러가는지도 몰랐다 반갑고 고맙다가 그치기도 하고 반갑고 고맙고 사랑하다가 행복을 빌어주기도 하겠지만, 결국 하거나 하지않거나 상관없는 말들. 김선재, 어두운 창들의 거리 더보기 내가 사랑했던 자리마다 모두 폐허다 슬프다 내가 사랑했던 자리마다 모두 폐허다 나에게 왔던 사람들. 어딘가 몇 군데는 부서진 채 모두 떠났다 내 가슴속엔 언제나 부우옇게 바람에 의해 이동하는 사막이 있고 뿌리 드러내고 쓰러져 있는 갈퀴나무, 그리고 말라 가는 죽은 짐승 귀에 모래 서걱거리는 어떤 연애로도 어떤 광기로도 이 무시무시한 곳에까지 함께 들어오지는 못했다 내 꿈들거리는 사막이, 그 고열이 에고가 벌겋게 달아올라 신음했으므로 내 사랑의 자리는 모두 폐허가 되어 있다 아무도 사랑해 본 적이 없다는 거 언제 다시 올지 모를 이 세상을 지나가면서 내 뼈아픈 후회는 바로 그거다 그 누구를 위해 그 누구를 사랑하지 않았다는 거 젊은 시절, 도덕적 경쟁심에서 내가 자청한 고난도 그 누구를 위한 헌신은 아녔다 나를 위한 헌신, 나를 위한 희생,.. 더보기 나는 아무것도 제대로 손에 쥔 적이 없어서 잃을 것도 없지만 온통 잃어버린 것투성이인 것 같은 사람이다 친구는 살아오면서 잃은 것에 대해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고, 나는 잃은 것에 대해 말할 게 없는 사람이다. 친구는 잃었다는 상실감이 충격이 될 만큼 무엇을 가진 적이 있던 사람이고, 나는 아무것도 제대로 손에 쥔 적이 없어서 잃을 것도 없지만 온통 잃어버린 것투성이인 것 같은 사람이다. 김소연, 『시옷의 세계』 더보기 아직 여름의 얼룩은 남아 당신의 여름을 떠올리게 하는 순간이다 당신은 갑자기 얼룩의 소용돌이고 지문이고 옛날의 유리창이다. 당신은 유리창이라는 단어보다 어떤 책의 제목인 유리문이라는 단어를 더 좋아했다 지금 창밖엔 귀뚜라미 울고 아직 여름의 얼룩은 남아 당신의 여름을 떠올리게 하는 순간이다. 당신은 모든 계절이었다. 당신은 그러나 점점 깊어지며 커지고 번지는 소용돌이로 다시 텅 비었다. 내가 당신을 너라 부르거나 당신이라고 부르거나 여보라고 부르거나 어떤 다른 이름으로 불러도 당신의 부재는 더욱 깊어져 이미 볼 수 없고 볼 수 없음으로 나와 함께 있다. 당신은 끈적거리고 더럽고 감미롭고 깨끗하고 부드럽고 질퍽거리며 떼어낼 수 없고 늪이고 죽음이고 또 사랑이고 그리움이다. 그리하여 당신은 끝내 여기에 없다. 당신의 웃음이 가라앉고 있다. 웃음의 반점을 남기며. 문득 .. 더보기 그곳엔 벚꽃이 하도 핀다고 그곳엔 벚꽃이 하도 핀다고 삼사월 밤이면 꿈을 꾸느라 앓고 앓아 두 눈이 닳을 지경이라고 당신이 그랬다 경청하는 두 귓속으로 바람이 일고 손이 손을 만났다 남은 기척 모두 곁에 두고 싶었던 까닭에 나는 애를 써도 잠이 들지 못했다 유희경, 불면 더보기 바다에서 떠내려온 닳고 반짝이는 유리조각을 주웠다 너랑 나는 화단에 앉아 사랑에 대해 이야기 했다 사람의 목소리를 녹음해서 틀고 그걸 다시 녹음하고 녹음한 걸 다시 틀고 다시 녹음하고 또 틀고 또 다시 녹음하고 이런 식의 과정을 계속해서 거치면 마지막에 남는 건 돌고래 울음소리 같은 어떤 음파뿐이래 그래 그건 정말 사랑인 것 같다 그걸로 시를 써야겠다 그렇게 얘기하며 화단에 앉아 옥수수를 먹었다 너는 내가 진통할 때 전화를 했다 나는 죽을 거 같아 전화 같은 건 안중에도 없었다 너는 내기에서 이겼다고 그럴 줄 알았다고 좋아했다 도무지 어떤 일도 끼어들 수 없는 비좁은 벽 사이에서 혼자 주먹으로 벽을 내리치며 울었다 윤은 소파에 앉아 안절부절 핸드폰을 보고 나는 오늘 유 캔 네버 고 홈 어게인을 다시 읽었다 그 시가 제일 좋다 나는 그렇다 옥수수는 은박지.. 더보기 이제 곧 한 세계가 질 것을 예감한 높이 1센티미터 슬픔 거짓말하고 싶다 내 눈은 늘 젖어 있고 나는 개 눈을 이해할 수 있다고 캄캄한 새벽 짖어대는 개들의 속내를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다고 금붕어처럼 세상을 배회하고 있다고 사랑했고 아직도 사랑한다고 벽에 이마를 대고 말하고 싶다 발밑에서 부드러운 뿌리가 썩고 있다 축축한 냄새를 피우며 나는 흙 속에 잠겨 썩은 뿌리를 관찰하는 조그마한 딱정벌레, 이제 곧 한 세계가 질 것을 예감한 높이 1센티미터 슬픔 박연준, 예감 더보기 이전 1 ··· 14 15 16 17 18 19 20 ··· 33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