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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갑자기 얼룩의 소용돌이고 지문이고 옛날의 유리창이다. 당신은 유리창이라는 단어보다 어떤 책의 제목인 유리문이라는 단어를 더 좋아했다
지금 창밖엔 귀뚜라미 울고 아직 여름의 얼룩은 남아 당신의 여름을 떠올리게 하는 순간이다. 당신은 모든 계절이었다. 당신은 그러나 점점 깊어지며 커지고 번지는 소용돌이로 다시 텅 비었다. 내가 당신을 너라 부르거나 당신이라고 부르거나 여보라고 부르거나 어떤 다른 이름으로 불러도 당신의 부재는 더욱 깊어져 이미 볼 수 없고 볼 수 없음으로 나와 함께 있다. 당신은 끈적거리고 더럽고 감미롭고 깨끗하고 부드럽고 질퍽거리며 떼어낼 수 없고 늪이고 죽음이고 또 사랑이고 그리움이다. 그리하여 당신은 끝내 여기에 없다. 당신의 웃음이 가라앉고 있다. 웃음의 반점을 남기며.
문득 드러나는 상처. 하얀, 드리워지는 것.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것. 당신의 부사를 싫어했고 나는 비유를 싫어했다. 당신은 관사를 싫어했고 나는 모국어가 미웠다. 우리 저 더러운 늪으로 들어가자, 병든 물고기가, 처음 본 괴물이 되어 다시 만나자, 했던가. 나는 지금 당신이 마시던 차를 마시고, 당신이 듣던 음악을 듣는다. 당신의 책에선 당신 방의 냄새가 아직도 나고, 나는 당신의 책을 펼칠 때마다 울음을 참는다. 당신은 저 아래 있고 나는 이 위에 있다. 당신의 번지는 얼룩, 나는 그것을 잊지 않는다. 당신의 부재가 나의 부재가 될 때까지.
이준규, 얼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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