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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팔월은 참 짙고 아득해서 나는 그렇게 있다
이곳엔 볕이 너무 많아 귀하지 않지 다리를 떨면서 다리를 떠는군 생각하면서 나는 아무 건물 아무 이 층 아무 사무실 아무 창문 위에서 볼 수 있는 아무 블라인드와 같은, 여름 팔월의 볕 구석에 매달린 흔하고 틈 많은 사연을 내리며 있다
조금 어두워졌다고 믿는다 나는 조금 어두워졌고 시원해졌다는 믿음 아래 있다 잠자코 검은 양산 하나를 펼쳐 나눠 쓰고 걸어가는 여자들을 본다 여름 팔월은 아랑곳없이 나무 그늘 아래를 지나가듯 걸어가는 그들을 본다
그들을 보고 있던 그런 내가 병과 주의와 주장과 그것들의 크기 그런 것들의 자취 그들의 미래와 후회에 대해 떠들어대듯 여름 팔월, 블라인드처럼 드리워놓은 사연들 속 그 덕분에 조금 어두워지고 시원해진 그 속에서 모든 것은 당신이 아니겠는가
당신 아니고서는 아닐 수 없는 것이 아니겠는가라고 대꾸하듯 나는 잔광처럼 남아 한들한들 흔들리고 있는 검은 양산을 생각해본다 죽이고 싶다와 죽고 싶다 사이 여름 팔월은 얼마나 많은 사랑이 넘쳐날 것인가 내려놓은 사연 뒤편에서 나는 그렇게 되어버리고 있다
유희경, 여름 팔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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