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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

손을 마주잡을 때마다 부서지는 나를 너는 모른다 지난날에 대해 기억하자면 좁은 방 안에 비가 내리는 나날이었다. 나는 네가 앓는 병의 이력이 적힌 쪽지를 모두 종이배로 접었다. 떠내려가지. 지금의 우리처럼. 그때의 시간처럼. 새벽보다 어두운 기후가 계속되는 한낮이었다. 서로의 상한 머리칼을 잘라주며 우리는 간결해졌지. 창문을 한 뼘만큼 열어놓으면 어느 먼 지역에서 날아왔을 눅눅한 바람이 우리 사이에서 진동했다. 아픈 것들은 모두 반짝일 수 있다고 믿어서. 찢어진 벽지마다 형광별을 붙이며. 우리가 꿈꾸는 건 위험한 속도로 녹는 눈, 조각난 먹구름 사이 찰나의 햇빛, 고인 빗물에 비춰지는 하늘 같은 것. 그러나 병을 감당하려 신음할 때 눈 감은 네가 어느 해변을 떠올리고 있는지 나는 모른다. 그 해변은 어느 기후 속에서 빛나고 있는지 나는 모른다. 그런 .. 더보기
당신은 나의 괴로움을 모른다 내 손을 주머니로 가져갔던 그 저녁은 살아있는듯 몹시 추웠다. 물건처럼 나는 한쪽 손을 전달했다 낯선 골목을 익숙한 듯 바라본다 당신은 나의 괴로움을 모른다 당신은 나의 정처없음을 모른다 당신은 이 세계가 곧 무너질 것을 모른다 우리는 잠시 코트 주머니 속의 공간을 절반씩 나누어 가졌다 당신이 그 순간을 기억해낼 수도 있다는 희미한 가능성을 나는 염두에 둔다 우리가 아주 오래전에 한 번 만났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당신이 하게 되려는 그 순간 손은 주머니에서 문득 빠져나왔다 그날 밤은 몹시 추웠던가 당신의 주머니에 들어갔다 나온 손은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와 단정하게 손목 아래 가만 놓여졌다 당신이 하려던 생각처럼 우리는 죽기 전에 한 번쯤 만났을지도 모른다 온전하지 않고 사라지지도 않는 기억이란 무엇인가.. 더보기
애인에게선 나비 냄새가 났다 애인에게선 나비 냄새가 났다 ​ 날개뼈를 긁어 주면 애인은 애벌레처럼 왼 겨드랑이를 파고들어 온다. 나는 침묵했고 애인은 나비가 되고 싶다는 말을 주문 걸듯 반복했다. 나비처럼 말하고 나비처럼 울고 나비처럼 속상해하며 눈에 띄게 말라 갔다. 며칠씩이 누에잠을 자고 의식이 있을 때도 최소한의 물만 마시고 이따금 냉소 띤 얼굴로 자신의 손목을 깨물어 달라고 했따. ​ 나비의 피가 흐를 것 같아 필사적으로 나비가 되고 있는 애인의 몸부림에 대해 기록하지 않기로 결심한 그 하루조차 우리는 연대한 적이 없었다. 아무도 읽지 않은 책의 두 번째 문장처럼 우리는 겨우겨우 서로를 정다워했을 뿐. 애인은 이제 나비처럼 숨을 쉬는떼 (나만 다시 몇 번이나 몇 번이나 아프도록) 그것이 흉기가 되어 나를 조롱하고 아예 나비가.. 더보기
울어도 바뀌는 건 없으며 삶은 계속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우린 다 죽었지 그런데 우리가 죽었다는 걸 아무도 모른다 우린 이미 죽었어요 말해도 모른다 매일 갑판을 쓸고 물처오를 하고 죽은 쥐들과 생선, 서로의 시체를 바다로 던져 버리고 태양을 본다 태양은 매일 뜨지 태양은 죽지 않아 밤이면 우리가 죽었다는 것을 죽음 이후에도 먹고 자고 울 수 있으며 울어도 바뀌는 건 없으며 삶은 계속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검은 쌀과 검은 물과 검은 밤의 폭풍을 오래오래 이가 녹아 사라질 때까지 씹는다 침수와 참수와 잠수의 밤 언젠가 우린 같은 꿈을 꾸었지 아주 무서운 꿈이었는데 꿈에서 본 것을 설명할 수 없어 잠에서 깬 우리는 모두 울고 있었다 아침이면 다시 태양 아래 가득 쌓여 있는 형체를 가늠하기 어려운 것들 풍량을 일으킨 거센 비바람은 누군가의 주문이었다는데 어째서 이런 .. 더보기
상어와 함께 자란 소년은 수영을 배울 필요가 없다 https://youtu.be/WBb7UlBE1cU 잘 자요. 이 한마디가 내게는 거대한 하늘 같아요. 어둡지만, 공허하지는 않죠. 까맣지만 쓰지 않아요. 멀지만 상상하기에는 충분히 가깝죠. (잘 자는 것에) 닿을 수 있을까요? 감정이 현실처럼 느껴진다면, 만질 수 있을까요? 나와 내 생각이 잠들 수 있는 넓은 침대가 있어요. 베개 위에는 머리가 있고 내 머리 속에는 질문이 떠올라요. 불면증은 가뭄과 같아요. 내가 (그 넓은 침대 위에서) 하는 일은 위를 바라보고 생각하는 것이 전부니까요. 과연 그것은 언제, 언제 올까요? 밤들은 나를 너무 잘 알아요. 나는 자주 이곳을 지나는 행인이었지만, 이제는 낮선 사람이 아니죠. 상어와 함께 자란 소년은 수영을 배울 필요가 없죠. 그에게 수영은 (배우려하지 않아도.. 더보기
천국에도 가고 싶지 않아 거기서도 살아야 하니까 저번 여름에 죽을 거라고 말했던 사람으로부터 먼저 연락이 왔다 익선동에서 보자고 했다 그는 지근거리에 살고 있으면서도 익선동은 처음이라고 했다 가까워서 늦은 저녁에 만나 안부를 묻자 그가 대답했다 천국에도 가고 싶지 않아 거기서도 살아야 하니까 매미가 얼마나 길게 우는지 측정하기 위해 머리 위로 무언가가 지나가는 동안 생겨나고 있고 없어지고 있고 끊임없이 이야기하며 걸었다 좋은 곳들에 대해 지친 그는 처마 아래 쭈그려 앉아 손으로 이마를 가리며 눈을 찡그렸다 만둣집 앞에 사람들이 서 있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줄이어서 나는 다른 곳으로 가자고 했다 하얀 수증기 속에서 언뜻언뜻 생각나는 사람들 얼마나 기다려야 해요? 방금 도착한 사람이 종업원에게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천국이 우유 한 잔이라면 좋을 텐데 어떤.. 더보기
내가 나이지 않기를 나에게 빌고 있다 세수를 하면서 얼굴을 빌고 있다 내가 나이지 않기를 나에게 빌고 있다 기도가 얼굴에 드러나지는 않는다 하나의 기도를 가진 사람은 하나를 이루지 못하지만 수없이 간절한 나는 수없이 이루지 못한다 ​ 아직 빌지 못한 손이 이렇게 아직 모으지 못한 손이 저렇게 나는 손 둘 곳이 없어지고 두 손 사이에서 유발되는 기갈 기도를 줄여야 하지만 기도의 형식을 배우지 못했다 비는 게 많아 비린 무얼 빌고 있는지도 잊어버린 손은 그때 발이 된다 기도 아닌 애완이 되고 자신의 얼굴에 손발을 비비는 '완전한 개 자세'가 된다 비는 것이 내가 아니란 걸 알게 된다 누구의 손으로 빌고 있는지 무얼 빌고 있는지 그럴 마음은 없는데 온몸이 기도하고 있다 알아서 기고 있다 두 손은 떨어져 있는데 한 손으로 비는 것은 가능한지 다른 .. 더보기
수시로 나는 나를 만나지 못하고 잃어버리곤 해 그녀는 가끔 내게로 소풍 온다. 그녀는 그릇을 닦다말고 골목을 건조하게 바라보는 습관이 있다. 접시가 불안하게 매달린 손 끝으로 여름이 왔다. 죽은 잎과 산 잎을 모두 달고 있는 화분이 제 마음 기우는 쪽으로 넘어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쓴다. 말없이 눈만 깊어지는 오후. 그녀가 피는 담배 연기처럼 거대한 적란운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종일 선풍기가 방 안으로 돌아다녔으며, 도시엔 먼지처럼 모래가 흩어졌다. 숨을 곳이 여름밖에 없다면 믿을 수 있겠어? 그러니깐 뭐든 끝이 있지 않겠어요? 종일 라디오를 들었다. 창문 아래로 벽을 지나 온 물의 흔적이 벽지에 죽은 다알리아처럼 피었다. 수시로 나는 나를 만나지 못하고 잃어버리곤 해. 가만히 내 몸을 내려다볼 때 참 쓸쓸해. 골목 어디쯤을 휘청이며 걸어가는 내 마..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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