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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

가도 가도 여름이었죠 가도 가도 여름이었죠. 흩어지려 할 때마다 구름은 몸을 바꾸고 풀들은 바라는 쪽으로 자라요. 누군가 길을 묻는다면 한꺼번에 쏟아질 수도 있겠죠. 쉼표를 흘려도 순서는 바뀌지 않으니까. 곁에는 꿈이니까 괜찮은 사람들. 괄호 속에서 깨어나는 사람들. 지킬 것이 없는 개들은 제 테두리를 핥고 햇빛은 바닥을 핥아요. 나는 뜬눈으로 가라앉고요. 돌 속에는 수많은 입들이 있고, 눈을 가린 당신이 있어요. 빗소리는 단번에 떨어져 수만 번 솟구치구요, 앞도 뒤도 없이 일제히 튀어 오르는 능선들. 갈 데까지 가고서야 공이 되는 법을 알았죠. 잎사귀처럼 바닥을 굴러 몸을 만들면, 바람을 숨긴 새처럼 마디를 꺾으면, 안은 분명할까요. 뼛속을 다 비우면, 바깥은 안이 될까요. 아직 가도 가도 어둠이에요. 하루가 가도 하루가 .. 더보기
관광지가 되는 건 너무 슬픈 것 같아 너무 슬픈 것 같아. 무수히 많은 사람들에게 짓밟힌 낯선 얼굴로 네가 말했다. 어제의 문장에 머무르지 않아. 내가 말했지. 일찍 밤이 찾아오거나 혹은 영원히 밤 같은, 밤의 의미가 상실된 도시에서. 늘 서둘러 겁을 집어먹고 집으로 돌아가는 서툰 풍경의 사람들. 폭우가 몰아치는 거리를 피해 너는 집으로 달아나려 입을 벌렸고, 나는. 나를 기다렸다. 정말 무서운 건 폭우를 피해 달아날 수 있는 새로운 다리가 놓아지는 일이지. 너와 나 사이에 여유롭게 구조물을 놓으며. 준비가 되면 호흡하는 바른 방법을 배우고 호흡할 수 있길 바랐지. 너와 내가 공통의 분모를 가진 우리가 되길. 관광지처럼 빠르게 달아오르고 재빨리 잊힌 뒤 영영 그리워지길 바라진 않아. 정말 슬픈 건 관광지를 떠나 마지막을 맞는 나의 마음이었다.. 더보기
그러니 모두 내게서 서둘러 하차하고 만 게 아닌가 내 집은 왜 종점에 있나 늘 안간힘으로 바퀴를 굴려야 겨우 가닿는 꼭대기 그러니 모두 내게서 서둘러 하차하고 만 게 아닌가 박소란, 주소 더보기
누가 다정하면 죽을 것 같았다 누가 다정하면 죽을 것 같았다 장미꽃나무 너무 다정할 때 그러하듯이 저녁 일몰 유독 다정할 때 유독 그러하듯이 뭘 잘못했는지 다정이 나를 죽일 것만 같았다 김경미, 다정이 나를 더보기
문득 내가 잘못 살고 있다는 느낌 잠자는 일만큼 쉬운 일도 없는 것을, 그 일도 제대로 할 수 없어 두 눈을 멀뚱멀뚱 뜨고 있는 밤 1시와 2시의 틈 사이로 밤 1시와 2시의 공상의 틈 사이로 문득 내가 잘못 살고 있다는 느낌, 그 느낌이 내 머리에 찬물을 한 바가지 퍼붓는다. 할말 없어 돌아누워 두 눈을 멀뚱하고 있으면, 내 젖은 몸을 안고 이왕 잘못 살았으면 계속 잘못 사는 방법도 방법이라고 악마 같은 밤이 나를 속인다. 오규원, 문득 잘못 살고 있다는 느낌이 더보기
삶을 취미로 한 지 오래되었다 기지개를 켠다 창밖 길 건너 장례식장은 불이 꺼졌다 몸이 추처럼 무거운 건 아무래도 익숙해지지 않는 울음소리가 젖은 신문지처럼 꿈에 들러붙었기 때문 흙갈이를 해줘야지 생각한 지 서너 해가 되었는데 밤새 화분 위로 낯모르는 색이 피었다 전화를 걸어야 했는데 주전가 물 끓는 소리에 그만 어제인 듯 잊었다 "한 발은 무덤에 두고 다른 한 발은 춤추면서 아직 이렇게 걷고 있다네." 검은 나비들이 쏟아져나온다 미뤄뒀던 책을 펼치자 창을 넘지 못하는 나비들, 그 검은 하품을 할 때, 느른한 음색 속에 등걸잠 같은 생이 다 들었다 나는 살고 있고, 내가 살아가도록 내버려두었다 삶을 취미로 한 지 오래되었다 *에두아르도 갈레아노,「시간의 목소리」 이현호, 오래된 취미 더보기
밖에를 못 나가겠어 길 가다 차가 오면 뛰어들고 싶어지니까 "밖에를 못 나가겠어. 길 가다 차가 오면 뛰어들고 싶어지니까. 누가 날 때려줬으면 좋겠어. 욕해줬으면, 아니 죽여줬으면 좋겠어. 나의 고통을 끝내줬으면 좋겠어. 근데 다들 내 탓 아니라고 위로만 해. " 김사과, 『천국에서』 더보기
온통 젖은 채 전부가 아닌 건 싫다고 영혼이 아프다고 그랬다. 산동네 공중전화로 더이상 그리움 같은 걸 말하지 않겠다고 다시는 술을 마시지도 않겠다고 고장난 보안등 아래서 너는 처음으로 울었다. 내가 일당 이만오천원짜리 일을 끝내고 달려가던 하숙촌 골목엔 이틀째 비가 내렸다. 나의 속성이 부럽다는 너의 편지를 받고 석간을 뒤적이던 나는 악마였다. 십일월 보도블록 위를 흘러다니는 건 쓸쓸한 철야기도였고, 부풀린 고향이었고, 벅찬 노래였을 뿐. 백목련 같은 너는 없다. 나는 네게서 살 수 없었는지도 모른다. 아침에 일어나면 떨리는 손에 분필을 들고 서 있을 너를 네가 살았다는 남쪽 어느 바닷가를 찾아가는 밤기차를 상상했다. 걸어서 강을 건너다 아이들이 몰려나오는 어린 잔디밭을 본다. 문득 너는 없다. 지나온 강 저쪽은 언제나 절망이었으므로. 잃..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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