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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끼리는 마음이 너무 아프면 죽을 수 있다고 말하던 너의 입술을 본다 빛이 새어든다. 너를 본다. 너를 비추는 햇빛을 본다. 너의 어깨 너머로 흐르는 구름을 본다. 구름 속 석양을 본다. 석양 속 코끼리 무리를 본다. 너를 본다. 너의 눈동자 속에 비친 내 얼굴을 본다. 그림 안과 밖에서 서로를 마주 보는 심정으로 너를 본다. 우리의 간격을 본다. 네 얼굴을 만진다. 형상은 온기로 잡힌다. 한 번도 부화한 적 없는 심장을 품고 너를 만진다. 잠든 너의 심장을 본다. 거대한 것들의 죽음은 거대해서 작은 것들의 죽음은 작아서 슬프다. 코끼리는 마음이 너무 아프면 죽을 수 있다고 말하던 너의 입술을 본다. 나는 슬픔 속에 죽어가는 코끼리를 본 적 없지만 너를 통과해 빠져나가는 붉은 코끼리를 본다. 그 코끼리가 너의 그림자를, 나의 그림자를 지고 멀어져 가는 것을 본다. 너를 본.. 더보기
네가 나의 마지막 여름 장미였지 스마트폰이 점령한 서울 젊음의 거리에 늦게 핀 여름 장미 21세기의 먼지를 뒤집어쓴 채 나, 여기 살아 있다고...... 장미넝쿨이 올라온 담벼락에 기대어 소나기 같은 키스를 퍼붓던 너. 네가 나의 마지막 여름 장미였지 아니, 가을이었나? 네가 선물한 서른 송이의 장미. 천천히 말려 죽여야 더 오래간다며 우리의 침대 위에 걸어둔 장미꽃들은 어디로 갔나 침대가 작다고 투덜대는 내게 너는 속삭였지 사랑하면 칼날 위에서도 잘 수 있어 최영미, 마지막 여름 장미 더보기
너의 무기력을 사랑해 너의 허스키를 사랑해, 너의 스키니한 몸을 사랑해, 너의 가벼운 주머니와 식욕 없음을 사랑해, 너의 무기력을 사랑해, 너의 허무를 사랑해, 너의 내일 없음을 사랑해. 김금희, 『너무 한낮의 연애』 더보기
사랑은 기다리는 거지 기다릴 것이 없어질 때까지 너는 밤과 낮이라고 한다. 너는 그게 사랑이라고 한다. 아니야. 사랑은 기다리는 거지. 기다릴 것이 없어질 때까지. 고층 건물이 세찬 바람에 조금씩 흔들리는 것을 본다고. 네 비밀을 내가 다 알면, 내 비밀을 네가 다 알면, 우리는 어떻게 될까? 그래도 우린 잠든다. 그르렁거리는 숨소리를 들으며 서로의 꿈에서 등을 돌린다. 비가 내리기 시작하고 천막 위로 빗줄기가 쏟아진다. 투둑투둑. 천장과 바닥이 호응하고, 우리는 그 사이에 누워 기다리나. 열매가 떨어지기를. 땔감이 모자라기를. 마른 풀이 전부 젖어 버리기를. 우리가 관통하는 물방울들. 모두 서로 배반할 거라고 맨 뒷장에 씌어져 있었지. 우리는 기다린다. 우리가 서로를 죽이기 전에, 너희가 서로를 죽이기를. 떠오를 때는 가라앉는 느낌도 들곤 해. 저 .. 더보기
당신은 가끔 불행을 자초한다고 나는 밤새 내가 좋아하는 책을 읽었어 내가 말했지? 행복한 결말을 좋아해야 행복한 사람이 된다고 당신은 가끔 불행을 자초한다고 불행 속에서 행복해하는 것 같다고 하지만 나는 그게 말장난이라고 생각해 밤새 아픈 사람 옆에서 해줄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어 그래도 당신이 고열에 시달리다 눈을 떴을 때 내가 잠들어 있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지 당신이 이렇게 힘이 없으니까 나는 괜히 우쭐하고 어쩐지 불공평하다고 느껴 당신은 깊은 바다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것 같기도 하고 악몽을 꾸는 사람 같기도 하고 외로워 보였다가 순식간에 편해진 사람 같아 그런데 우리가 불공평하지 않은 적이 있던가 밤이 지나면 뭔가를 들킨 기분에 잠시 나를 멀리하다 고맙다고 하겠지 착하니까 세상이 전에 없이 활력을 띠겠지 친구들에게 가족들에게 직.. 더보기
잠겨 죽어도 좋으니 너는 물처럼 내게 밀려오라 낮은 곳에 있고 싶었다 낮은 곳이라면 지상의 그 어디라도 좋다 찰랑찰랑 고여들 네 사랑을 온 몸으로 받아들일 수만 있다면 한 방울도 헛되이 새어 나가지 않게 할 수 있다면 그래, 내가 낮은 곳에 있겠다는 건 너를 위해 나를 온전히 비우겠다는 것이다 잠겨 죽어도 좋으니 너는 물처럼 내게 밀려오라 이정하, 낮은 곳으로 더보기
지겨워 지겨워 태어난다는 건 무엇일까 겨울이 지겨울 때마다 그 짓을 했다 길고 나른하게 서로의 몸을 껴안으며 둘 중 하나는 죽기를 바라듯 그럴 때마다 살아 있다는 게 징글징글해져 눈이 길게 찢어졌다 사랑이 없는 밤의 짙고 고요한 계절처럼 이 반복된 허기가 기나긴 겨울을 연장시켰을까 네 손바닥에 모르는 주소를 쓰고 겨울의 조난자들처럼 밤을 찾던 저녁이었지 자꾸 잠이 오는 게 괜찮을까 흔들리는 벽지 아래 서로의 손목을 쥐여주면 꽤 멋진 연인이 되었다 우리는 가짜와 진짜처럼 정말 닮았구나 궁색하게 남은 목숨의 자국이나 껴안으며 가까워질수록 사라지는 표정처럼 지겨워 지겨워 태어난다는 건 무엇일까 나는 울고 있었을 뿐인데 박은정, 긴 겨울 더보기
불행은 편지였다 불행은 편지였다 언젠가는 도착하기로 되어있고 언제 올지는 몰랐으므로 양말 속에 어떻게 들어갔을까 나의 바닥을 어떻게 길가에 앉아 구두끈을 푼다 상처의 방향으로 몸이 쏟아진다 모두 집어 던졌었지 그때 깨진 컵은 내 살을 기다리며 서랍 속에서 뿔이 되었던가 젖은 신발 벗고 피 묻은 사금파리를 꺼내는 일 아픔은 꺼낼 수 없는 일 나의 바깥에서 떠도는 조각들을 기다려야 할까 최현우, 컵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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