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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죽은 이름들이 너무 많아 내 이름을 잊는 날도 있겠지만 그래도 불러줄 거지? 검은 연기가 피어올랐어. 우리는 밀밭 빛깔 트럭을 타고 있었는데 유리창에 거미줄 같은 금이 가 있었지. 아직 앳된 운전병이 가슴 밖으로 빠져나가는 숨을 힘겹게 몰아쉬고 있었어. 뜨거운 액체가 바지를 적시고 발밑에 작은 고랑을 만들었지만 우린 아무것도 할 수 없었어. 비스듬히 고개를 기댄 그는 사과궤짝에 남은 썩은 사과처럼 검붉은 과즙을 흘리고 있었지. 고요한 저녁이 오고 있어. 작은 고랑은 가장자리부터 말라가고 푸른 사과는 입을 조금 벌린 채로 편안해 보였지. 한밤, 더러운 야전침대에 누워 불러야 하는 이름들이 있어. 영문도 모르고 죽은 어린 영혼들. 머리맡에 앉아서 정답게 속삭이는 것들. 죽은 이름들이 너무 많아 내 이름을 잊는 날도 있겠지만 그래도 불러줄 거지? 임현정, 사과궤짝 더보기
삶이 너무 길어요 인생은 형벌같기만 하고 이런 게 다 무슨 소용이겠니 아무도 듣지 못하는 비명의 주머니가 사람마다 하나씩 마음 안에 감춰져 있다고 머리채를 붙든 손은 이리저리 오가고 질끈 눈을 감았나, 그 장면을 내 눈으로 봤다고 믿을 수 없다 아버지, 삶이 너무 길어요 인생은 형벌같기만 하고 하루하루 불 속에서 불을 기다리는 기분 백은선, 불가사의, 여름, 기도 더보기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단 한 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힘없는 책갈피는 이 종이를 떨어뜨리리 그때 내 마음은 너무나 많은 공장을 세웠으니 어리석게도 그토록 기록할 것이 많았구나 구름 밑을 천천히 쏘다니는 개처럼 지칠 줄 모르고 공중에서 머뭇거렸구나 나 가진 것 탄식 밖에 없어 저녁 거리마다 물끄러미 청춘을 세워 두고 살아온 날들을 신기하게 세어보았으니 그 누구도 나를 두려워하지 않았으니 내 희망의 내용은 질투뿐이었구나 그리하여 나는 우선 여기에 짧은 글을 남겨둔다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단 한 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 기형도, 질투는 나의 힘 더보기
결국 다 젖게 하는 사람은 한때 비를 가려주었던 사람이다 비가 차창을 뚫어버릴 듯 퍼붓는다 윈도브러시가 바삐 빗물을 밀어낸다 밀어낸 자리를 다시 밀고 오는 울음 저녁때쯤 길이 퉁퉁 불어 있겠다 비가 따닥따닥 떨어질 때마다 젖고, 아프고 결국 다 젖게 하는 사람은 한때 비를 가려주었던 사람이다 삶에 물기를 원했지만 이토록 많은 물은 아니었다 윈도브러시는 물을 흡수하는 게 아니라 밀어내고 있으므로 그 물들은 다시 돌아올 것이다 저렇게 밀려났던 아우성 그리고 아직 건너오지 못한 한사람 이따금 이렇게 퍼붓듯 비 오실 때 남아서 남아서 막무가내가 된다 이규리, 많은 물 더보기
뜨거움이 모자랄 때마다 나는, 발바닥인 것 같아 네가 올 때마다 육각형 눈이 와. 나는 여름 들판에서 너를 기다려. 하얀 벌들이 밤하늘을 뒤덮고, 나의 심장에도 차가운 눈이 내려. 너는 새벽에서 이곳으로 와. 빈방에서 여름으로 와. 그럴 때 너는 너보다 커 보이거나 작아 보여. 그림자놀이처럼. 침엽수에게 어떤 모양의 잎을 달고 싶으냐고 물으면 흰 왕관처럼 얹힌 눈이 녹아버릴까. 북쪽 여왕의 반대말은 북쪽 왕인가 남쪽 여왕인가 남쪽 허름한 소녀인가 소년인가. 이런 걸 궁금해하면 네가 화를 낼까. 담요를 드릴까요. 물어보면 네가 조금씩 녹을까. 녹으면서 허둥댈까. 너는 하얀 자동차를 타고 한 방향으로 가. 추위를 느끼지 못하는 나라로. 눈보라가 치고 침엽수가 자라는 빈방 속의 반방으로. 나는 옆구리나 심장으로 태어났으면 좋았을 거라고 생각할 때가 많아. .. 더보기
잘라내도 살아지는 생은 얼마나 진저리 쳐지는지 꼬리를 잘라내고 전진하는 도마뱀처럼 생은 툭툭 끊기며 간다 어떤 미련이 두려워 스스로 몸을 끊어내고 죽은 나를 돌아보지도 않고 스스럼이 없나 한 몸의 사랑이 떠나듯 나를 떠나보내고 한 몸의 기억이 잊히듯 나를 지우고 한 내가 썩고 또 한 내가 문드러지는 동안 잘라낸 마디마다 파문같은 골이 진다 이 흉터들은 영혼에 대한 몸의 조공일까 거울을 보면 몸을 바꾼 나는 나를 알아보지 못 하고 무언가에 잘려나간 자리만 가만가만 만져보는 것이다 심장이 꽃처럼 한 잎 한 잎 지는 것이라면 그런 것이라면 이렇게 단단히 아프진 않을 텐데 몸을 갈아입으면 또 한 마음이 자라느라 저리는 곳이 많다 잘라내도 살아지는 생은 얼마나 진저리 쳐지는지 수억 광년을 살다 터져버리는 별들은 모르지 흉터가 무늬가 되는 이 긴긴 시간 동안 .. 더보기
온 힘을 다해 살아내지 않기로 했다 온 힘을 다해 살아내지 않기로 했다. 꽃이 지는 것을 보고 알았다. 기절하지 않으려고 눈동자를 깜빡였다. 한 번으로 부족해 두 번 깜빡였다. 너는 긴 인생을 틀린 맞춤법으로 살았고 그건 너의 잘못이 아니었다. 이 삶이 시계라면 나는 바늘을 부러뜨릴 테다.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처럼 하염없이 밥을 먹을 테다. 한 그릇이 부족하면 두 그릇을 먹는다. 해가 떠오른다. 꽃이 핀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울고 싶은 기분이 든다. 누구에게도 말 못 하고 주기도문을 외우는 음독의 시간. 지금이 몇 시일까. 왕만두 찐빵이 먹고 싶다. 나발을 불며 지나가는 밤의 공벌레야. 여전히 너도 그늘이구나. 온 힘을 다해 살아내지 않기로 했다. 죽었던 나무가 살아나는 것을 보고 알았다. 틀린 맞춤법을 호주머니에서 꺼냈다. 부끄러.. 더보기
나는 꼬리를 잃고 사람의 무엇을 얻었나 몽골에서 기르던 개가 죽으면 꼬리를 자르고 묻어준단다 다음 생에서는 사람으로 태어나라고, 사람으로 태어난 나는 궁금하다 내 꼬리를 잘라준 주인은 어떤 기도와 함께 나를 묻었을까 가만히 꼬리뼈를 만져본다 나는 꼬리를 잃고 사람의 무엇을 얻었나 거짓말할 때의 표정 같은 거 개보다 훨씬 길게 슬픔과 싸워야 할 시간 같은 거 개였을 때 나는 이것을 원했을까 사람이 된 나는 궁금하다 지평선 아래로 지는 붉은 태양과 그 자리에 떠오르는 은하수 양떼를 몰고 초원을 달리던 바람의 속도를 잊고 또 고비사막의 외로운 밤을 잊고 그 밤보다 더 외로운 인생을 정말 바랐을까 꼬리가 있던 흔적을 더듬으며 모래언덕에 뒹굴고 있을 나의 꼬리를 생각한다 꼬리를 자른 주인의 슬픈 축복으로 나는 적어도 허무를 얻었으나 내 개의 꼬리는 어..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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