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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다시 태어나면 죽지 말아야지 죽어도 좋겠다 생각한 순간 너는 웃었고 나는 죽었다 다시 태어나면 죽지 말아야지 잠깐 또 생각을 했다 오래 봐야지 죽지 말아야지 말을 새긴 새빨간 것을 단번에 삼키니 나는 사랑을 하네 당연하단 듯이 네가 고개를 끄덕이네 아아 입안을 맴돌다 뱉은 얼룩이 사랑의 시가 되어 손끝으로 네게로 흘러간다 당연하단 듯이 꼭 정해져 있단 뜻처럼 마치 되감기라도 한 것처럼 삼킨 것이 두근거린다 너는 나를 사랑하지 사랑하기 위해 내가 태어난 것처럼 너는 웃었고 나는 앓았다 먼 시간을 걸어 결국 또 한 번 너를 사랑하는구나 죽어도 좋겠다 생각했다 향돌, 사랑의 시 더보기
나는 흔하고, 어디든 있고, 나는 흔하고, 어디든 있고, 그러니 내가 혼자서 울고 있는 것도 나쁘지는 않아 유희경, 오늘은 더보기
어쩌면 나는 물질이 아니라 절망 그 자체일지도 몰라 외로운 날에는 빛을 반사하던 천정이 꽃잎을 떨어뜨리며 손을 내밀어 그러면 향기의 입자들이 눈처럼 내리곤 하지 난 숨을 쉴 때마다 선명해지는 깃털의 무늬를 봐 저것 좀 봐 졸린 백조처럼 겨드랑이에 얼굴 비비는 스탠드 조명 그 창백한 광경 속으로 각기 다른 계절로 공기의 입자들이 자라나 그건 음표를 새기기 전 벌거벗은 호수가 되기도 하고 검은 안경테를 쓰고 노을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숲이 되기도 해 창밖은 온통 어두운 육성의 스피커를 매달고 있지 그 속에서 백야의 악기들이 촛농처럼 떨어지곤 해 그럴 때마다 난 비문(非文)으로 흔들리곤 해 도대체 누구일까? 외로움의 질량을 느끼자 영하의 잠을 청하는 자는, 외로움에 질식한다는 것은 빛이 묻은 부분만으로도 슬픈 마디의 음표가 될 수 있는 건가 봐 책상 위에는 두.. 더보기
세계가 점점 싱거워지던 날들 장마는 지속되고 수박은 맛없어진다. 여름이니까 그럴 수 있다. 전에도 이런 날이 있었다. 태양 아래, 잘 익은 단감처럼 단단했던 지구가 당도를 잃고 물러지던 날들이. 아주 먼데서 형성된 기류가 이곳까지 흘러와 내게 영향을 주던 시간이. 비가 내리고, 계속 내리고, 자꾸 내리던 시절이. 말하자면 세계가 점점 싱거워지던 날들이 말이다. 김애란, 『비행운』 더보기
그렇지 않아도 무언가를 잃는 것이 버거운 나이였다 그렇지 않아도 무언가를 잃는 것이 버거운 나이였다. 온 힘을 다해 아파하고 온종일 집중해서 성심성의껏 비관할 수 있는 몹쓸 젊음 때문이었다. 모든 것을 다해 사랑하기로 한 사람이 사라진 날, 심장이 뛰는 순간순간마다 안으로 돋친 가시가 1밀리씩 자라났다. 안으로 자라는 외골격에 갇힌 채 껍질이 강요하는 모양대로 간신히 서서 비틀거리던 삶. 배명훈, 『미래과거시제』 더보기
지구 한끝에서 누군가 어깨를 들썩이며 울고 있기 때문이라고 바람이 불지 않아도 무사히 이파리들이 떨어져내렸다. 어떤 시인이었던가, 바람이 불지 않아도 낙엽이 떨어지는 건, 지구 한끝에서 누군가 어깨를 들썩이며 울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별들의 들판, 공지영 더보기
왜냐하면, 당신은 언젠가 반드시 나를 버릴 테니까 왜냐하면, 당신은 언젠가 반드시 나를 버릴 테니까. 내가 가장 약하고 도움이 필요할 때, 돌이킬 수 없이 서늘하게 등을 돌릴 테니까. 그걸 나는 투명하게 알고 있으니까. 그걸 알기 전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되었으니까. 흰, 한강 더보기
망각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Blessed are forgetful, for they get the better even of their blunders. 망각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자기 실수조차 잊기 때문이라. 니체, 영화 이터널 선샤인 中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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