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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 글귀 & 대사

어쩌면 나는 물질이 아니라 절망 그 자체일지도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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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운 날에는 빛을 반사하던 천정이 꽃잎을
떨어뜨리며 손을 내밀어
그러면 향기의 입자들이 눈처럼 내리곤 하지
난 숨을 쉴 때마다
선명해지는 깃털의 무늬를 봐
저것 좀 봐
졸린 백조처럼 겨드랑이에 얼굴 비비는 스탠드 조명
그 창백한 광경 속으로
각기 다른 계절로 공기의 입자들이 자라나
그건 음표를 새기기 전 벌거벗은 호수가 되기도 하고
검은 안경테를 쓰고 노을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숲이 되기도 해
창밖은 온통 어두운 육성의 스피커를 매달고 있지
그 속에서 백야의 악기들이 촛농처럼 떨어지곤 해
그럴 때마다 난 비문(非文)으로 흔들리곤 해
도대체 누구일까?
외로움의 질량을 느끼자 영하의 잠을 청하는 자는,
외로움에 질식한다는 것은 빛이 묻은 부분만으로도
슬픈 마디의 음표가 될 수 있는 건가 봐
책상 위에는
두꺼운 외투를 입은 국어대사전이 있어
하지만 어디에도 입을 막고 울고 있는
물음들의 표정을 읽어내지는 못해
세상에 없는 빛의 터널을 지나가려는 자는
비명소리 때문에 항상 이름부터 차가워지지
살아서 묘비명을 세워야 하잖아?
그래, 어쩌면 나는 물질이 아니라 절망 그 자체일지도 몰라


김원경, 비문(非文)의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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