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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 틈에 끼인 살아 본 적 없는 생을 걷어 내고 싶었다 사람들 틈에 끼인 살아 본 적 없는 생을 걷어 내고 싶었다. 모든 게 잘 보이게 다시 없이 선명하게 난 오늘 공중전화통을 붙잡고 모든 걸 다 고백한다. 죽이고 싶었고 사랑했고 하늘을 나는 새를 보라는 성경 구절에도 마음이 흔들린다고. 그리고 오늘은 목요일. 죽이 끓든 밥이 끓든 나는 변하지 못했고 또 목요일. 형상이 없으면 그림이 아니야. 따귀 한 대에 침 한 번씩 뱉고 밤을 새우면 신을 만날 줄 알았지. 그림 같은 건 잊은 지 오래라는 녀석들 몇 명과 그들의 자존심과 그들의 투항과 술을 마신다. 그중에 내가 있다. 오늘은 목요일. 결국 오늘도 꿈이 피를 말린다. 그 꿈이 나한테 이럴 수가. 허연, 목요일 더보기
물속에 있으면 비를 잊을 수 있다 물속에 있으면 비를 잊을 수 있다 침대도 편지도 없고 마른 것도 없다 몸을 한껏 펼친다 머릿속에서 눅눅한 페이지들이 천천히 녹아내린다 물속은 가득 차 있다 물고기들이 제 몸속으로 음악을 삼키고 있다 배 속에 진회색 구름이 차오른다 물속에는 갈림길이 없다 잠길 수 있다 결빙이 없다 표정처럼, 얼음은 언제나 바깥부터 시작된다 목욕도 없다 가끔 숲이 있다 흔들리는 부드러운 나무들 물속에서는 옷장이 필요 없다 그 사이에서 물고기들은 헐벗거나 먹거나 마신다 말없이 그러나 물고기들은 음악을 풍기고 있다 수면이 얼어붙는 동안에도 풍만한 냄새로 가득 찬 움직이는 음표 물속에서 누군가의 뺨을 때릴 수 있었다면, 상대방이 멈추기로 결심했기 때문에 가능한 음악이 있다 물속에는 식탁이 없다 마주 볼 필요 없다 비명 없이 우리.. 더보기
그날 이후로 너무 푸른 것은 구분할 수 없었다 그날밤, 바다에서 우리가 보았던 것은 해변의 놀이공원, 부모와 아이 하나로 이루어진 현대적 가족, 요란스럽기만 한 불꽃놀이와 어떤 기대 속에서 몸을 붙여 걷던 연인들 "바다 냄새는 죽은 생물들이 내는 냄새래" 그렇게 말하던 너의 살은 푸르고 짠 냄새가 났지 그날 이후로 너무 푸른 것은 구분할 수 없었다 누군가의 발자국을 따라 홀로 걸었다 이제 해변에는 아무도 없구나 바닷가의 텅 빈 유원지, 출렁이는 검은 모래, 죽은 물새떼와 영원히 푸른 달빛 "너를 다시 볼 수 있어서 참 좋다" 네가 말했을 때,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고 눈앞에 펼쳐진 밤과 바다가 구분되지 않았다 그것을 지켜보던 두 사람이 구분되지 않고, 너를 생각하는 이 마음이 무엇인지 구분되지 않는다 해변의 발자국은 끝없이 이어져 있었다 나는 .. 더보기
누구든 외롭다는 말은 나중에 배운다 외국어는 지붕과 함께 배운다. 빗방울처럼. 정교하게. 오늘은 내가 누구입니까? 사망한 사람은 무엇으로 부릅니까? 비가 내리면 낯선 입모양으로 지낸다. 당신은 언제 스스로일까요? 부디 당신의 영혼을 말해주십시오. 지붕은 새와 구름과 의문문 그리고 소년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누구든 외롭다는 말은 나중에 배운다. 시신으로서. 사전도 없이. 당신은 마침내 입술을 가지고 있습니다. 오늘은 매우 반복합니다. 지붕이 빗방울들을 하나하나 깨닫듯이 진심이라는 단어는 언제나 지금 발음한다. 모국어가 없이 태어난 사람의 타오르는 입술로. 나는 시체의 진심에 몰두할 때가 있다. 이상한 입모양을 하고 있다. 이장욱, 오늘은 당신의 진심입니까? 더보기
이대로는 익사할 거라고 말한다 나는 물을 좋아하고 너는 물을 좋아하지 않는다 우리는 갈증으로 대립한다 물은 너의 감정이다 너의 기분에 따라 그날의 컵이 바뀌고 물의 온도가 달라진다 태도는 미온적이다 너는 웅크리고 있거나 드러누워 있다 나갔다 돌아오면 방은 침수되어 있다 너는 금붕어 두어 마리를 기르고 있다 그것들은 서로 먹고, 교배하고, 낳고, 먹기를 반복한다 창은 굳게 닫혀 있다 이대로는 익사할 거라고 말한다 너는 듣지 않는다 벽지는 자주 바뀐다 붉었다가 푸르렀다가, 꽃잎 무늬였다가 방울 무늬가 된다 나갔다 돌아오면 방은 침수되어 있다 벽지는 젖어 있다 너처럼 물고기들은 벽의 감정을 배운다 바라보거나 바라보지 않거나 물고기는 식탁 유리를 좋아하고 창의 유리를 좋아하지 않는다 나는 유리를 좋아하지 않는다 나는 살아 있는 아무것도 기르.. 더보기
검은 바다 위로 네 몸뚱이가 오르내리고 있었다 따라오지 마, 따라오지 마, 따라오지 마, 세 번 외치고 돌아봤다 ​ 검은 바다 위로 네 몸뚱이가 오르내리고 있었다 나는 많은 말을 했다. 나는 외톨이이며, 나는 씩씩하다. 나는 왜소하지만, 왜소함을 넘어서는 매력을 가지고 있다. 너는 금빛 머리를 휘날리며 웃고 있었다. 나는 더 많은 말을 했다. 나는 그 정도 침묵에 굴하는 자가 아니며, 침묵에는 침묵으로 맞서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따위의 법칙을 무시할 수 있을 정도로 강하다. 너는 곱슬머리가 흔들리도록 웃고 있었다. 너는 내 눈을 만진다. 내 코를 꼬집는다. 나는 계속해서 말한다. 나를 만지지 말라, 장-뤽 낭시가 쓴 책을 읽었다. 나는 종교가 없지만, 신은 믿을 만하다고 생각하므로, 너는 신을 믿느냐 묻고 싶었다. 너는 웃는다. 너는 웃다가 벤.. 더보기
여름이 오려면 당신이 필요하다 여름을 그리려면 종이가 필요해 종이는 물에 녹지 않아야 하고 상상하는 것보다 크거나 훨씬 작을 수도 있다 너무 큰 해변은 완성되지 않는다 너무 아름다운 해변은 액자에 걸면 가져가버린다 당신이 조금 느리고 천천히 말하는 사람이라면 하나 남은 검은색 파스텔로 아무도 오지 않는 바다를 그리자 당신의 여름이 기분이거나 기억에서 지우고 싶은 여행지라면 시원한 문장을 골라서 글로 쓸 수 있는데 여름이 오려면 당신이 필요하다 모두가 숙소로 돌아간 뒤에 당신이 나를 기다린다면 좋겠다 파도가 치고 있다 누군가는 고래를 보았다며 사진을 찍거나 주머니에서 만년필을 꺼내겠지만 고래는 너무 커서 밑그림을 그릴 수 없고 모래는 너무 작아서 부끄러움을 가릴 수 없다 바다가 보이는 방에서 두 사람을 기다린다 그들이 오면 여름은 지나.. 더보기
그냥 그 순간이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어 기억이란 건 순서에 따라 차곡차곡 쌓이는게 아니야. 만약 그렇다면 오래된 기억들부터 차례로 잊혀지겠지? 그런데 기억들은 언제나 순서를 어기고 뒤죽박죽이 되거든, 그리고 어느 날 갑자기 엉뚱한 곳에서 엉뚱한 기억이 불쑥 솟아 오르는거야. 그것도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순간. 이를테면 꿈 같은 데서 말이야. 그런 걸 아무렇지도 않게 넘길 수 있는 사람은 없어. 그 느낌은 뭐랄까 그래, 마치 멀미 같은 거야. 그 기분알지? 머리가 아프고 멍해지고 세상이 흔들리고, 심장에 커다란 추가 매달려 있는 것처럼 거북해서 토해버리고 싶은데 마음대로 안되고... 그냥 그 순간이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어. 아주 무기력하게. 그냥 울면서. 황경신, 『부주의한 친절』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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