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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픈

난 알 수 있어 네 삶이 슬픈 이야기가 아니란 사실을 알게 될 순간이 올 거라는 걸 넌 날 도와주었지. 내가 무슨말을 하는지 네가 이해하지 못한다거나 혹은 그걸 알아챌 누군가를 알고 있다거나 해서 그게 더 이상 날 외롭게 하지는 않아. 왜냐하면 난 모든 게 괜찮을 거라고 말해주는 사람들을 알고 있거든. 17살이 되면 16살이란 어떤 건지 다 잊어버리는 사람들도 알고 있고. 언젠가 이 모든 게 이야기가 되겠지. 우리 사진은 옛날 사진으로 남을 거고. 그리고 우린 누군가의 어머니, 아버지가 되어 있을거야. 하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책에서의 이야기가 아냐. 일어나고 있는 이야기고 난 여기에 있어. 그리고 난 그녀를 보고 있어. 그녀는 참 아름다워. 난 알 수 있어. 네 삶이 슬픈 이야기가 아니란 사실을 알게 될 순간이 올 거라는 걸. 넌 살아있어. 넌 일어서서 건물들의 불빛들을 볼 수 있어.. 더보기
사람에게 이야기해서만 구할 수 있는 마음이 존재하는지도 모른다고 나의 신에게 조용히 털어놓았던 밤이 있었다 그런 밤이 있었다. 사람에게 기대고 싶은 밤. 나를 오해하고 조롱하고 비난하고 이용할지도 모를, 그리하여 나를 낙담하게 하고 상처 입힐 수 있는 사람이라는 피조물에게 나의 마음을 열어 보여주고 싶은 밤이 있었다. 사람에게 이야기해서만 구할 수 있는 마음이 존재하는지도 모른다고 나의 신에게 조용히 털어놓았던 밤이 있었다. 최은영, 『내게 무해한 사람』 중 더보기
자기를 구원하는 방법이 죽음뿐인 사람도 있지 자살이 어때서. 자기를 죽이는 게 뭐 어때서. 다들 조금씩은 자기를 죽이면서 살지 않나? 자기 인격과 자존심과 진심을 파괴하고 때로는 없는 사람처럼, 죽은 사람처럼, 그러지 않나? 그렇게 사는 게 죽는 것보다 끔찍할 수 있다. 그럼 죽을 수 있지. 죽는게 뭐 이상해. 자살이라고 달라? 남을 위해 죽을 수 있다면 자기를 위해 죽을수도 있지. 자기를 구원하는 방법이 죽음뿐인 사람도 있지. 최진영, 『비상문』 더보기
죽는 건 하나도 안 무서운데 죽을 것 같은 느낌은 왜 그렇게 싫은지 모르겠어요 죽는 건 하나도 안 무서운데 죽을 것 같은 느낌은 왜 그렇게 싫은지 모르겠어요. 박완서, 『나의 가장 나종 지니인 것』 더보기
나는 그 순간 무서움보다는 외로움 때문에 몸을 떨었다 나는 결국 나 혼자일 수밖에 없음을 깨달았고 아무도 지금의 나를 구해줄 수 없다는 걸 알았다. 나는 그 순간 무서움보다는 외로움 때문에 몸을 떨었다. 김후란, 『노래하는 나무』 더보기
너는 사라질 때까지만 내 옆에 있어준다고 했다 얼음장 밑을 흘러왔다고 했다. 힘들었던 건 내가 아니라 겨울이었다고 했다. 우리가 '첫사랑은……' 어쩌구 하는 70년대식年代式 방화邦畵 속에서 눈덩이를 던지며 사랑을 쫓던 늦은 오후에 어느새 너는 서걱이는 마른 대숲을 지나 내 곁에 왔다고 했다. 어머니는 아직도 무릎이 아프다고. 이젠 정말 걸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고, 녹슬은 편지함 속에서 울었다. 그런 밤마다 나는 어머니가 아닌 너를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지난해 따뜻했던 몇 가지 기억들을. 다시 돌아온 너에게, 말 없는 눈발로 내 옆에 서 있었던 쓸쓸함을 묻지 않으리라. 어느 날 막막한 강변로에서 다시 너를 잃어버리고 창문 틈에 너를 기다린다는 연서戀書를 꽂아놓을 때까지. 네가 옆에 없음을 알고 전율戰慄할 때까지. 낡은 자명종의 태엽을 감으며, 너는 사.. 더보기
마음만으로는 될 수도 없고 꼭 내 마음 같지도 않은 일들이 봄에는 널려 있었다 얼마 전 손목을 깊게 그은 당신과 마주 앉아 통닭을 먹는다 당신이 입가를 닦을 때마다 소매 사이로 검고 붉은 테가 내비친다 당신 집에는 물 대신 술이 있고 봄 대신 밤이 있고 당신이 사랑했던 사람 대신 내가 있다 한참이나 말이 없던 내가 처음 던진 질문은 왜 봄에 죽으려 했냐는 것이었다 창밖을 바라보던 당신이 내게 고개를 돌려 그럼 겨울에 죽을 것이냐며 웃었다 마음만으로는 될 수도 없고 꼭 내 마음 같지도 않은 일들이 봄에는 널려 있었다 박 준, 그해 봄에 더보기
끝없이 출렁이는 저 푸른 껍질 한 장을 핀셋으로 집어 올려 거대한 벽에 걸어두면 끝없이 출렁이는 저 푸른 껍질 한 장을 핀셋으로 집어 올려 거대한 벽에 걸어두면 벽에서 푸른 물이 뚝뚝 떨어지겠지 암청색 물감을 칠한 듯 흰 벽이 얼룩지겠지 아래위로 굵은 청색 선이 그어지겠지 거대한 벽은 푸른색으로 굳어 차츰 시퍼런 균열이 생기고 덩어리는 갈라지겠지 물이 굳어서 생긴 푸른 틈이 벽 속으로 스며들어 벽 속은 깊고 깊은 푸른 세계가 생겨나겠지 그 세계 속으로 우리는 유연하게 침입할 수 있을까 삼베로 겹겹이 옷을 만들어 입고 심연으로 풍덩 뛰어들었다 몸을 차례로 물들였다 이 세상의 모든 덩어리는 출렁이고 접히고 또 출렁이는 질료였다 아무것도 끝이 없다 우리는 각자 죽을 때까지 고독할 수 있다 표면은 덩어리이고 덩어리는 심연이다 조용미, 표면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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