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728x90

너를 보면 쓸쓸한 바다를 닮는다 바다를 보면 바다를 닮고 나무를 보면 나무를 닮고 모두 자신이 바라보는 걸 닮아간다 멀어져서 아득하고 아름다운 너는 흰 셔츠처럼 펄럭이지 바람에 펄럭이는 것들을 보면 가슴이 아파서 내 눈 속의 새들이 아우성친다 너도 나를 그리워할까 분홍빛 부드러운 내 손이 다가와 돌려가는 추억의 영사기 이토록 함께 보낸 시간이 많았구나 사라진 시간 사라진 사람 바다를 보면 바다를 닮고 해를 보면 해를 닮고 너를 보면 쓸쓸한 바다를 닮는다 신현림, 바다를 보면 바다를 닮고 더보기
너로 시작해 내게 와 흐른 바람은 너를 바라게 했다 너는 나의 바람이었다 개나리 향을 가득 실어서, 나를 채운 초봄 바람이었으며, 민들레 홀씨들을 담아 흐른 여름의 바람이었다 바람, 너로 시작해 내게 와 흐른 바람은 너를 바라게 했다 나는 너를 바람 너는 내게 바람 백가희, 나의 바람 더보기
죽고 싶어 환장했던 날들 죽고 싶어 환장했던 날들 그래 있었지 죽고 난 후엔 더 이상 읽을 시가 없어 쓸쓸해지도록 지상의 시들을 다 읽고 싶었지만 읽기도 전에 다시 쓰여지는 시들이라니 시들했다 살아서는 다시 갈 수 없는 곳이 생겨나고 있다고 내가 목 매달지 못한 구름이 붉은 맨드라미를 안고 울었던가 그 여름 세상 어떤 아름다운 문장도 살고 싶지 않다로만 읽히던 때 그래 있었지 오전과 오후의 거리란 게 딱 이승과 저승의 거리와 같다고 중얼중얼 폐인처럼 저녁이 오기도 전에 그날도 오후 두시는 딱 죽기 좋은 시간이었고 나는 정말 최선을 다해 울어보았다 이승희, 그리운 맨드라미를 위하여 더보기
이 세계를 잃어버리고 싶어 나를 좀 가려줄래 아무도 없는 말들의 잎사귀들의 정원 가위로 잘라낸 가지들이 누구의 말일까 너의 말일까 속삭이는 것들은 떨어지고 밖이 어디인지 몰라서 그래 누군가 부른 나무들의 벽은 자라고 자라 옷을 갈아입는 여인들을 가려줄 만큼 단단히 서는 가지의 눈들 안으로 안으로만 웅얼거리는 눈을 좀 가려줄래 너의 예언으로 이 세계를 잃어버리고 싶어 벽들이 둘러진 이 미로에 마주 서서 이름을 잃을 손목들이 짠 카페트를 펼치면 될까 벽이 가려지면 남겨진 정원이 열리고 네가 불러낸 예언들이 거기서 숲과 열매가 되어 서서 잠들어야 했던 시간을 향기롭게 만들 수 있을까 내가 잃어버린 세계로 너를 안아 가릴 수 있을까 밖이 어딘지 아는 예언이 숨은 숨 쉬고 숨 쉬어 엮는 한 번은 손안에 있던 세계 펼치면 바람에 펄럭이는 잎.. 더보기
네 삶의 비밀번호는 무엇이었을까 문을 뜯고 네가 살던 집에 들어갔다 문을 열어줄 네가 없기에 네 삶의 비밀번호는 무엇이었을까 더 이상 세상에 세들어 살지 않게 된 너는 대답이 없고 열쇠공의 손을 빌어 너의 집에 들어갔다 금방이라도 걸어 나갈 것 같은 신발들 식탁 위에 흩어져 있는 접시들 건조대에 널려 있는 빨래들 화분 속 말라버린 화초들 책상 위에 놓은 책과 노트들 다시 더러워질 수도 깨끗해질 수도 없는, 무릎 꿇은 물건들 다시, 너를 앉힐 수 없는 의자 다시, 너를 눕힐 수 없는 침대 다시, 너를 덮을 수 없는 담요 다시, 너를 비출 수 없는 거울 다시, 너를 가둘 수 없는 열쇠 다시, 우체통에 던져질 수 없는, 쓰다 만 편지 다시, 다시는 이 말만이 무력하게 허공을 맴돌았다 무엇보다도 네가 없는 이 일요일은 다시, 반복되지 않을 것.. 더보기
우리는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다 우리는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다. 사랑할수록 죄가 되는 날들. 시들 시간도 없이 재가 되는 꽃들. 말하지 않는 말속에만 꽃이 피어 있었다. 천천히 죽어갈 시간이 필요하다. 천천이 울 수 있는 사각이 필요하다. 품이 큰 옷 속에 잠겨 숨이 막힐 때까지. 무한한 백지 위에서 말을 잃을 때까지. 한 줄 쓰면 한 줄 지워지는 날들. 지우고 오려내는 것에 익숙해졌다. 마지막은 왼손으로 쓴다. 왼손의 반대를 무릅쓰고 쓴다. 되풀이되는 날들이라 오해할 만한 날들 속에서. 너는 기억을 멈추기로 하였다. 우리의 입말은 모래 폭풍으로 사라져버린 작은 집 속에 있다. 갇혀 있는 것. 이를테면 숨겨온 마음 같은 것. 내가 나로 살기 원한다는 것. 너를 너로 바라보겠다는 것. 마지막은 왼손으로 쓴다. 왼손의 반대를 바라며 쓴다... 더보기
처음인 것들이 맨 나중을 설명하는 그곳에 고래가 있었다 붉은 장미*의 기억을 끝으로 바다를 접는 고래. 붉은, 호흡을 꺼내 구름을 탁본한다 자신이 끌고 다닌 하루의 기록을 찾아보지만 탁본 속에는 주어도 서술어도 생략된 비문(非文)만 가득하다 겨우 찾아낸 꽃잎 문양 수의를 혼자 입기 어려워서 꼬리를 들썩이다가 눈동자 속 파도를 꺼내 보다가 바람이 뜯어먹던 발자국을 지나고 백사장이 구워낸 해당화 그늘을 기웃대며 간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것들을 이정표 삼아 아는 길을 가듯 간다 쓰러진 채로 고개 끄덕이는 몸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어 자꾸만 돌아보며 바다 쪽으로 길을 잡는다 끼니를 잊은 철학자처럼 느릿느릿 잠 속으로 빠져드는 고래 낯익은 물결을 만났을까 잠깐 웃음이 스친 듯도 한데 몸속에 남아 있던 바다가 쿨럭, 외마디를 내뱉는다 제 몸에서 나오는 뜻밖의 비명에.. 더보기
깊은 어느 모서리에서 자란 달에 레몬 냄새가 나서 내 볼은 떨린다 당신의 눈 속에 가끔 달이 뜰 때도 있었다 여름은 연인의 집에 들르느라 서두르던 태양처럼 짧았다 당신이 있던 그 봄 가을 겨울, 당신과 나는 한 번도 노래를 한 적이 없다 우리의 계절은 여름이었다 시퍼런 빛들이 무작위로 내 이마를 짓이겼다 그리고 나는 한 번도 당신의 잠을 포옹하지 못했다 다만 더운 김을 뿜으며 비가 지나가고 천둥도 가끔 와서 냇물은 사랑니 나던 청춘처럼 앓았다 가난하고도 즐거워 오랫동안 마음의 파랑 같을 점심식사를 나누던 빛 속, 누군가 그 점심에 우리의 불우한 미래를 예언했다 우린 살짝 웃으며 대답했다, 우린 그냥 우리의 가슴이에요 불우해도 우리의 식사는 언제나 가득했다 예언은 개나 물어가라지, 우리의 현재는 나비처럼 충분했고 영영 돌아오지 않을 것처럼 그리고 곧 사라질만큼 아름다웠다.. 더보기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