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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어질 때 더 다정한 쪽이 덜 사랑한 사람이다 그래봤자 결국 후두둑 나뭇잎 떨어지는 소리일 뿐. 오늘부터 나는 반성하지 않을 테다. 오늘부터 나는 반성을 반성하지 않을 테다. 그러나 너의 수첩은 얇아질 대로 얇아진 채로 스프링만 튀어오를 태세. 나는 그래요. 쓰지 않고는 반성할 수 없어요. 반성은 우물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된 너의 습관. 너는 입을 다문다. 너는 지친다. 지칠 만도 하다. 우리의 잘못은 서로의 이름을 대문자로 착각한 것일 뿐. 네가 울 것 같은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면 나는 둘중의 하나를 선택하겠다고 결심한다. 네가 없어지거나 내가 없어지거나 둘 중의 하나라고. 그러나 너는 등을 보인 채 창문 위에 뜻 모를 글자만 쓴다. 당연히 글자는 보이지 않는다. 가느다란 입김이라도 새어나오는 겨울이라면 의도한 대로 너는 네 존재의 고독을 타인에게 .. 더보기
타인을 견디는 것과 외로움을 견디는 일 어떤 것이 더 난해한가 ​ 꽃은 시들고 불로 구운 그릇은 깨진다 타인을 견디는 것과 외로움을 견디는 일 어떤 것이 더 난해한가 다 자라지도 않았는데 늙어가고 있다 그러나 감상은 단지 기후 같은 것 완전히 절망하지도 온전히 희망하지도 미안하지만 나의 모자여 나는 아무것도 믿지 않는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허상 녹슬고 부서지는 동상보다는 방구석 먼지와 머리카락의 연대를 믿겠다 어금니 뒤쪽을 착색하는 니코틴과 죽은 뒤에도 자라는 손톱의 습관을 희망하겠다 약속보다는 복숭아의 욕창을 애무보다는 허벅지를 무는 벼룩을 상스러운 빛보다는 거울 속에서 나를 바라보는 희미한 어둠을 캄캄한 길에선 먼 빛을 디뎌야 하므로 날 수 없어 춤을 추고 울 수 없어 노래하는 지상에 흔들리는 찌를 지니고 사는 사람들은 별자리를 그린다 허은실, 목 없는 나날 더보기
파도는 죽어서도 다시 바다였다 종일 마른 비 내리는 소리가 전부인 바다였다 욕실에는 벌레가 누워있고 그것은 죽은 물처럼 얌전한 얼굴, 구겨진 얼굴을 거울에 비추면 혐오는 보이는 것보다 가까이에 있었다 나는 미개한 해변 위에 몇 통의 편지를 찢었다 날아가는 새들, 날개 없는 새들이 폭죽처럼 터지고 파도가 서로의 몸을 물고 내 발끝으로 와 죽어갔다 한 번 죽은 것들이 다시 돌아와 죽기를 반복하는 백사장에서 떠난 애인의 새로운 애인 따위가 그려졌다 다시 더러워지고는 했다 그대의 손등처럼 바스락거리는 벌레가 욕실에 있었다 벌레는, 곱디고운 소름 같은 어느 여인의 잘라낸 머리칼 같았다 나는 위독한 여인 하나를 약봉지처럼 접고 오래도록 펴보았다 많은 것이 보이고 슬펐으나 한결같이 흔한 것들 뿐이었다 나는 애먼 얼굴을 거울 안에 그렫두었다 잘린 .. 더보기
모두 별을 쫓아 밤이 되길 기원했다 암호로 되어 있었다. 우리는 우리의 아무것도 믿지 않아. 나는 다리가 꺾인 짐승처럼 빙 돌아와 말했다. 아 파 요. 간격을 두고 마디마다. 몸이 찢어진 벌레들 위에 누운 언니는 숨겨진 것들의 작은 아픔을 욕망했고, 핀셋을 들어 관찰했다. 때때로 나는 공포를 가지지 못한 사람처럼 나의 내장에 기생하는 벌레들을 상상했다. 우리는 무력함에 대해 생각했다. 나의 욕망은 너의 아픔보다 중요한 일일까. 너와 나는 우리를 자세히 훼손했다. 눈물이 많아요. 노래하고 춤추고 연기하고 배경이 되고 단역이 되고. 어두운 커튼으로 내려앉아 불빛으로 새어나가고. 우리의 날 속에 쳐진 얇은 막이 눈치채지 못하게. 우리는 서로를 파괴할 때 더 사랑해요. 우리의 사랑은 얼마나 얇고 견고하고 위태롭고 많은 단어의 색을 가졌는지 모릅니.. 더보기
내가 바라는 건 아주 작고 희미한 것들뿐 손을 씻자 낯빛이 검어졌다. 내 어둠의 깊이를 헤아리는 밤. 오래된 망상과 코카콜라와 데스메탈과 카발라와 차오르는 귓구멍의 물기와 너와 나의 아득한 피킹 하모닉스. 나의 기타는 너무 많은 심장을 가진 것처럼 끊어지기 직전의 팽팽한 긴장으로. 새끼손가락이 짧은 나의 운지법은 더듬더듬 춤추듯 절룩거리고. 적막이란 적막 이전에 소리가 있었다는 말. 너무 많은 심장이 우리를 질식하게 한다. 생각한 그대로 끝에서 끝으로 밀고 나아가려 했던 것이 우리의 때아닌 조로의 이유. 너는 사각형의 소녀처럼 울었고 그 뾰족한 모서리가 무심히 나를 찔렀다. 뜬눈으로 꿈속을 들락거리다 다시 술 마시고 담배 피우고 술 마시고 담배 피우고. 시적인 문장을 찾으려 할 떄마다 죄를 짓는 기분. 조금도 시적이지 않은 언어의 빙판 위에서 .. 더보기
돌아오지 않는 것들은 언제까지 돌아오지 않는 것들일까 ​ 그 시절 나는 잘 말린 무화과나무 열매처럼 다락방 창틀 위에 조용히 놓여 있었다. 장례식 종이 울리고 비둘기 날아오를 때 불구경 간 엄마는 돌아오지 않았다. 오빠는 일 년 내내 방학. 조울을 앓는 그의 그림자는 길어졌다 짧아졌다 짧아졌다 길어졌다. 넌 아직 어려서 말해 줘도 모를 거야. 내 손바닥 위로 무화과나무 열매 두 개를 떨어뜨리고 오빠도 떠나갔다. 기다리지도 않는데 기다리는 사람이 되는 일은 무료한 휴일 한낮의 천장 모서리같이 아득했다. 오빠가 떠나간 남겨진 다락방은 내 혼잣말이 되었다. 열려진 창밖으로 끝없는 바다. 밤낮 없이 울고 있는 파도. 주인을 잃은 마호가니 책상 위에는 연두 보라 자주 녹두 색색 종이테이프 지우개 연필 증오 수줍음 비밀 비밀들. 도르르 어둠의 귓바퀴를 감아 넣듯 파랑.. 더보기
여름 팔월은 참 짙고 아득해서 나는 그렇게 있다 여름 팔월은 참 짙고 아득해서 나는 그렇게 있다 이곳엔 볕이 너무 많아 귀하지 않지 다리를 떨면서 다리를 떠는군 생각하면서 나는 아무 건물 아무 이 층 아무 사무실 아무 창문 위에서 볼 수 있는 아무 블라인드와 같은, 여름 팔월의 볕 구석에 매달린 흔하고 틈 많은 사연을 내리며 있다 조금 어두워졌다고 믿는다 나는 조금 어두워졌고 시원해졌다는 믿음 아래 있다 잠자코 검은 양산 하나를 펼쳐 나눠 쓰고 걸어가는 여자들을 본다 여름 팔월은 아랑곳없이 나무 그늘 아래를 지나가듯 걸어가는 그들을 본다 그들을 보고 있던 그런 내가 병과 주의와 주장과 그것들의 크기 그런 것들의 자취 그들의 미래와 후회에 대해 떠들어대듯 여름 팔월, 블라인드처럼 드리워놓은 사연들 속 그 덕분에 조금 어두워지고 시원해진 그 속에서 모든 .. 더보기
언젠가 나는 너였을 것이다 언젠가 인간은 천사였던 적이 있지 않을까. 너의 날개 뼈를 만지면서. 폭약이 누군가의 마음을 뒤흔드는 새벽. 너는 붓을 적시며 말한다. 악마도, 이 세상의 조류도 모두 날개 뼈를 갖고 있다고. 종이가 되길 원한 나무는 너로 인해 하나의 그림이 되어가는 중인데. 어느 신화에 따르면 태양과 달을 신의 눈동자라 믿었다고 한다. 그러나 어느 짐승의 두 눈일지도. 전생에 우리는 꽃이었을지도 몰라. 나는 너의 머리칼을 쓸어 모으면서. 아니. 나는 물이었을 거야. 물을 만질 때마다 불안이 전부 씻겨 내려가거든. 폭약이 우리 불안을 뒤흔드는 새벽. 네가 그린 꽃은 호수에서 목을 적시고 있었다. 짐승의 등 위로 나뭇잎이 돋아나고. 인간은 누군가를 죽이기 위해 불을 만들고 불은 누군가를 죽이기 위해 재를 만든다. 재는 무..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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