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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일 마른 비 내리는 소리가 전부인 바다였다
욕실에는 벌레가 누워있고 그것은 죽은 물처럼 얌전한 얼굴,
구겨진 얼굴을 거울에 비추면
혐오는 보이는 것보다 가까이에 있었다
나는 미개한 해변 위에 몇 통의 편지를 찢었다
날아가는 새들, 날개 없는 새들이 폭죽처럼 터지고
파도가 서로의 몸을 물고 내 발끝으로 와 죽어갔다
한 번 죽은 것들이 다시 돌아와 죽기를 반복하는 백사장에서
떠난 애인의 새로운 애인 따위가 그려졌다 다시
더러워지고는 했다
그대의 손등처럼 바스락거리는 벌레가 욕실에 있었다 벌레는,
곱디고운 소름 같은 어느 여인의 잘라낸 머리칼 같았다
나는 위독한 여인 하나를 약봉지처럼 접고
오래도록 펴보았다 많은 것이 보이고
슬펐으나 한결같이 흔한 것들 뿐이었다
나는 애먼 얼굴을 거울 안에 그렫두었다
잘린 머리칼을 제자리에 붙여주면 어여쁘고 흉한,
평화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위독한 미소의 여자가
커다란 가위를 든 채 거울 밖에 있었다
이 위태로움을 어찌 두고 갈 수 있을까? 그대여,
네가 죽었으면 좋겠어,라고 쓴 그대의 편지를
두어 번 더 기억하며 해변을 따라 걸었다
슬픔에 비겁했다, 생각할수록 자꾸 여며지는 백사장
말하자면 그건 소용없는 커튼, 소용없는 커튼은
창밖을 곤히 지웠다 도무지 펄럭이지 않았다
파도는 죽어서도 다시 바다였다
죽을 힘을 다해
죽는 연습을 하는 최초의 생명 같았다
오병량, 묻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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