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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여름을 죽도록 좋아한다 여름이 아닌 것들을 좋아한다 그러니까 얼어붙은 강,누군가와 마주 잡은 손의 온기, 창문을 꼭꼭 닫아 놓고서 누운 밤, 쟁반 가득 쌓인 귤껍질들이 말라 가는 것을 좋아한다 여름은 창을 열고 나를 눅눅하게 만들기를 좋아한다 물이끼처럼 자꾸 방 안에 자라는 냄새들이, 귤 알갱이처럼 똑똑 씹히는 말들이 혓바닥에서 미끄러진다 곰이 그 위에 누워 있다 동물원 우리에 갇힌 곰이, 수박을 우걱우걱 먹어 치우던 곰이 나를 쳐다본다 곰에게서 침 범벅의 수박 물이 떨어진다 여기가 동물원이 아니라 내 방이라는 것을 알아 갈 때쯤, 나는 혼자 남아 8월을 벗어난다 그러니까 수박이 아닌 것들을 좋아한다 차가운 방바닥에 눕는 것을 좋아한다 피가 나도록 긁는 것을 좋아한다 좋아한다는 것들이 땀띠처럼 늘어난다 그러니까 나는 이 여름을.. 더보기
사랑해도 혼나지 않는 꿈이었다 쌀을 씻다가 창밖을 봤다 숲으로 이어지는 길이었다 그 사람이 들어갔다 나오지 않았다 엣날 일이다 저녁에는 저녁을 먹어야지 아침에는 아침을 먹고 밤에는 눈을 감았다 사랑해도 혼나지 않는 꿈이었다 황인찬, 무화과 숲 더보기
사랑해, 네 눈물이 지하수를 타고 올 만큼 날 사랑해 줘 가끔 너를 찾아 땅속으로 내려가기도 했단다 저 침침하고도 축축한 땅속에서 시간의 가장자리에만 머물러 있던 너를 찾으려 했지 땅속으로 내려갈수록 저 뿌리들 좀 봐, 땅에는 어쩌면 저렇게도 식물의 어머니들이 작은 신경줄처럼 설켜서 아리따운 보석들을 빨랫줄에 걸어두는데 저 얇은 시간의 막을 통과한 루비나 사파이어 같은 것들이 땅이 흘린 눈물을 받은 양 저렇게 빛나잖아 가끔 너를 찾아 땅속으로 내려가기도 했단다 사랑 아니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세월 속으로 가고 싶어서 머리를 지하수에 집어넣고 유리처럼 선명한 두통을 다스리고 싶었지 네 눈에 눈물이 가득할 때 땅은 속으로 그 많은 지하수를 머금고 얼마나 울고 싶어 하나 대양에는 저렇게 많은 물들이 지구의 허리를 보듬고 안고 있나 어쩌면 네가 밤 속에 누워 녹아갈 때.. 더보기
벚꽃의 점괘를 받아적는 일이란 봄기운도 참 바람이 이렇게 달아 살살 간지럽겠다 몽글몽글 벚꽃의 아치 아래서 당신은 봄의 호작질에 놀아나는 중이다 시시로 연인의 입술에 달라붙은 꽃잎을 흡- 하고 숨결로 떼어내거나 꽃을 먼저 보낸 성급한 푸른 잎이 연인의 분홍 잇몸에 돋아나는 걸 보겠다 혹은 흩날리는 벚꽃이 허투루 흘리는 점괘 따위를 받아 모시거나, 애면글면하거나 구운몽에 문자로 수작을 건넨다는 말이 있다 오늘의 문자는 다름 아닌 벚꽃의 아스라한 점괘, 쉬 풀리는 점괘는 사설일 뿐 오래 헤매도 좋을 당신이겠다 마침 연인의 입매가 쉽사리 홀릴 운산은 아닌데, 애간장이라도 살살 무쳐 연인의 입맛을 돋울 수 있다면 그러니 당신, 화전놀이에 수작이 빠져서야 될까 꽃술이 서로의 입술에 번지듯 물들고 술잔의 꽃잎 돌 듯 꽝꽝 언 피가 돌고 나서야 .. 더보기
낭만 없는 낭만에서도 너의 낭만이 되어줄게 눈에는 하얀 구름을 붙이자. 서서히 모든 어둠이 낮이 될 수 있어. 반짝이는 구름이 초승달을 만나는 정류장은 갓난아이와 노인이 사랑을 할 수 있는 곳이니까. 시들함과 보들보들함이 만나 상쾌해지는 물감 같은. 구름을 노란 손으로 꽉 쥐면 달이 된다는 믿음으로 너의 낭만이 되어줄게. 코에는 점점 살이 찌는 낙엽을 달자. 살아나는 향기를 맡으면서 사라져가는 쓸쓸한 냄새를 잊자. 종이 꽃이 통통한 줄기와 닿는 오후는 백지 스케치북 한 페이지가 전시회장에 걸리는 황홀함이니까. 무제 같은 제목으로. 사라지는 소리가 재회의 약속 같은 계절에 너의 낭만이 되어줄게. 입에는 혀 가까이까지 낭만을 걸자. 낭만, 낭만. 부르기만 해도 불러지는 투명의 사건처럼. 침샘이 말라도 낭만의 노래가 도착할 때까지. 잎이 자라는 것은 .. 더보기
별이 떨어진다면 당신이 있는 공간으로 별이 떨어진다면 당신이 있는 공간으로 네가 아침잠에서 깨어 방문을 열었을 때 천장을 뚫고 쏟아지는 별들 나는 그 별을 함께 주워 담거나 그 별에 상처 난 너의 팔을 잡아 주고 싶었다 지나 보면 역시나 난 할 줄 아는 게 없었는데 너에겐 특히나 그랬다 조용히 밥을 먹는 너보다 더 조용히 밥을 먹으며 너를 고요하고 불편하게 만들었다 나의 고요한 아이야, 가끔은 시끄럽게 너와 선루프를 열고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정적이 찾아올 때 벌거벗은 나의 등을 안아 주던 게 생각난다 너는 작고 나는 포근했다 우린 오래오래 안녕이지만 오래오래 사랑한 기분이 든다 네 머리를 쓰다듬고 강에 뛰어들고 싶다 오래오래 허우적거리며 손의 감촉을 버리고 싶다 한 행성이 내게 멀어져 간 것은 재앙이다 네가 두고 간 것들을 나만 보게 되었.. 더보기
나는 늘 아파 딸기밭을 걷고 있어 자박자박 네게로 가는 길이야 네게선 절망적인 맛이 나는구나 11월의 모든 날은 너를 위한 거야 그러니 날 마음껏 다뤄 줘 고양이처럼 내 쇄골을 핥아 주면 좋겠어 까끌까끌한 네 혀에선 핏빛이 돌겠지 한번 으깨진 마음은 언제쯤 나을까 궁금한 게 너무 많아서 나는 나를 설득할 수가 없어 그래도 네게선 딸기향이 나 세상이 조금 더 우울해지고 있는데도 너는 맛있고 맛있고 맛있어 심장이 뛰어 어느 날 내가 숨을 쉬지 못하면 얌전한 키스를 하면 돼 맛있겠다 그런 식으로 바라보지 마 너는 미소 짓는 법을 다시 배워야겠구나 푸른 박쥐처럼 날고 싶어 밤이 오면 나방 떼처럼 아무 곳이나 쏘다니겠지 온몸에 멍이 들고, 눈물로 얼룩진 발목 쓰다듬어 줄래? 관자놀이 밑을, 턱 선을, 감은 눈을 그러니 날 마음.. 더보기
밤이 되면 속을 게워내고 두 발이 녹고 네가 보였다 밤이 되면 속을 게워내고 두 발이 녹고 네가 보였다 너는 환하게 웃고 있다 ‘날 사랑하니?’ 너는 입모양이 보이는데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너는 너의 존재를 확인하려 자꾸 내게 물었다 너의 입술이 흐려지고 있었다 정신을 차리고 나면 한낮이었다 너는 사라지고 없는데 어디선가 너의 질문이 계속 들렸다 양안다, 이명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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