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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가 점점 싱거워지던 날들 장마는 지속되고 수박은 맛없어진다. 여름이니까 그럴 수 있다. 전에도 이런 날이 있었다. 태양 아래, 잘 익은 단감처럼 단단했던 지구가 당도를 잃고 물러지던 날들이. 아주 먼데서 형성된 기류가 이곳까지 흘러와 내게 영향을 주던 시간이. 비가 내리고, 계속 내리고, 자꾸 내리던 시절이. 말하자면 세계가 점점 싱거워지던 날들이 말이다. 김애란, 『비행운』 더보기
그렇지 않아도 무언가를 잃는 것이 버거운 나이였다 그렇지 않아도 무언가를 잃는 것이 버거운 나이였다. 온 힘을 다해 아파하고 온종일 집중해서 성심성의껏 비관할 수 있는 몹쓸 젊음 때문이었다. 모든 것을 다해 사랑하기로 한 사람이 사라진 날, 심장이 뛰는 순간순간마다 안으로 돋친 가시가 1밀리씩 자라났다. 안으로 자라는 외골격에 갇힌 채 껍질이 강요하는 모양대로 간신히 서서 비틀거리던 삶. 배명훈, 『미래과거시제』 더보기
지구 한끝에서 누군가 어깨를 들썩이며 울고 있기 때문이라고 바람이 불지 않아도 무사히 이파리들이 떨어져내렸다. 어떤 시인이었던가, 바람이 불지 않아도 낙엽이 떨어지는 건, 지구 한끝에서 누군가 어깨를 들썩이며 울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별들의 들판, 공지영 더보기
왜냐하면, 당신은 언젠가 반드시 나를 버릴 테니까 왜냐하면, 당신은 언젠가 반드시 나를 버릴 테니까. 내가 가장 약하고 도움이 필요할 때, 돌이킬 수 없이 서늘하게 등을 돌릴 테니까. 그걸 나는 투명하게 알고 있으니까. 그걸 알기 전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되었으니까. 흰, 한강 더보기
망각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Blessed are forgetful, for they get the better even of their blunders. 망각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자기 실수조차 잊기 때문이라. 니체, 영화 이터널 선샤인 中 더보기
Eternal sunshine How happy is the blameless vestal’s lot! The world forgetting, by the world forgot. Eternal sunshine of the spotless mind! Each pray’r accepted, and each wish resign’d 결점 없는 수녀의 삶은 얼마나 행복한가! 세상을 잊고, 세상으로부터 잊히니. 순결한 정신의 영원한 햇빛! 모든 기도를 받아들이고, 모든 바람을 체념하니. 알렉산더 포프,『엘로이즈가 아벨라르에게』, 영화 이터널 선샤인 中 더보기
여기가 아닌 다른 곳으로 가고 싶다 이것이 아닌 다른 것을 갖고 싶다. 여기가 아닌 다른 곳으로 가고 싶다. 괴로움 외로움 그리움 내 청춘의 영원한 트라이앵글. 최승자, 내 청춘의 영원한 더보기
덜 망가진 채로 가고 싶다 죽을 때 죽는다는 걸 알 수 있어? 죽으면 어디로 가는 거야? 죽을 때 모습 그대로 죽는 거야? 죽어서도 엄마는 내 엄마야? 때를 가늠하는 나무의 말로 여섯 살 딸이 묻다가 울었다 입맞춤이 싫증나도 사랑은 사랑일까 반성하지 않는 죄도 죄일까 깨지 않아도 아침은 아침일까 나는 나로부터 도망칠 수 있을까 흐름을 가늠하는 물의 말로 마흔 넷의 나는 시에게 묻곤 했다 덜 망가진 채로 가고 싶다 더 이상 빚도 없고 이자도 없다 죽어서야 기억되는 법이다 이젠 너희들이 나를 사는 거다 어둠을 가늠하는 속 깊은 흙의 말로 여든 다섯에 아버지는 그리 묻히셨다 바닥을 향해 피는 상수리 꽃을 마주하여 젖은 물살을 저어가는 지느러미뼈를 마주하여 흙에서 깨어나는 달팽이 촉수를 마주하여 고스란히 제 짐 지고 제 집에 들어앉듯 다..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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