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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성

애인에게선 나비 냄새가 났다 애인에게선 나비 냄새가 났다 ​ 날개뼈를 긁어 주면 애인은 애벌레처럼 왼 겨드랑이를 파고들어 온다. 나는 침묵했고 애인은 나비가 되고 싶다는 말을 주문 걸듯 반복했다. 나비처럼 말하고 나비처럼 울고 나비처럼 속상해하며 눈에 띄게 말라 갔다. 며칠씩이 누에잠을 자고 의식이 있을 때도 최소한의 물만 마시고 이따금 냉소 띤 얼굴로 자신의 손목을 깨물어 달라고 했따. ​ 나비의 피가 흐를 것 같아 필사적으로 나비가 되고 있는 애인의 몸부림에 대해 기록하지 않기로 결심한 그 하루조차 우리는 연대한 적이 없었다. 아무도 읽지 않은 책의 두 번째 문장처럼 우리는 겨우겨우 서로를 정다워했을 뿐. 애인은 이제 나비처럼 숨을 쉬는떼 (나만 다시 몇 번이나 몇 번이나 아프도록) 그것이 흉기가 되어 나를 조롱하고 아예 나비가.. 더보기
울어도 바뀌는 건 없으며 삶은 계속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우린 다 죽었지 그런데 우리가 죽었다는 걸 아무도 모른다 우린 이미 죽었어요 말해도 모른다 매일 갑판을 쓸고 물처오를 하고 죽은 쥐들과 생선, 서로의 시체를 바다로 던져 버리고 태양을 본다 태양은 매일 뜨지 태양은 죽지 않아 밤이면 우리가 죽었다는 것을 죽음 이후에도 먹고 자고 울 수 있으며 울어도 바뀌는 건 없으며 삶은 계속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검은 쌀과 검은 물과 검은 밤의 폭풍을 오래오래 이가 녹아 사라질 때까지 씹는다 침수와 참수와 잠수의 밤 언젠가 우린 같은 꿈을 꾸었지 아주 무서운 꿈이었는데 꿈에서 본 것을 설명할 수 없어 잠에서 깬 우리는 모두 울고 있었다 아침이면 다시 태양 아래 가득 쌓여 있는 형체를 가늠하기 어려운 것들 풍량을 일으킨 거센 비바람은 누군가의 주문이었다는데 어째서 이런 .. 더보기
상어와 함께 자란 소년은 수영을 배울 필요가 없다 https://youtu.be/WBb7UlBE1cU 잘 자요. 이 한마디가 내게는 거대한 하늘 같아요. 어둡지만, 공허하지는 않죠. 까맣지만 쓰지 않아요. 멀지만 상상하기에는 충분히 가깝죠. (잘 자는 것에) 닿을 수 있을까요? 감정이 현실처럼 느껴진다면, 만질 수 있을까요? 나와 내 생각이 잠들 수 있는 넓은 침대가 있어요. 베개 위에는 머리가 있고 내 머리 속에는 질문이 떠올라요. 불면증은 가뭄과 같아요. 내가 (그 넓은 침대 위에서) 하는 일은 위를 바라보고 생각하는 것이 전부니까요. 과연 그것은 언제, 언제 올까요? 밤들은 나를 너무 잘 알아요. 나는 자주 이곳을 지나는 행인이었지만, 이제는 낮선 사람이 아니죠. 상어와 함께 자란 소년은 수영을 배울 필요가 없죠. 그에게 수영은 (배우려하지 않아도.. 더보기
네가 나를 보고 등대처럼 웃었어 잠시 눈이 멀었던 것은 비밀로 할게 너와 밤을 헤엄치는 꿈을 꿨어 우리는 누구도 발 딛지 않은 섬에 가 닿았어 하늘에는 파도가 치고 아무도 이름 지어 주지 않은 별의 군락이 있었지 이름 없는 물고기 떼가 수면 근처를 은하수처럼 헤엄칠 때 네가 그곳을 가리켰어 나는 쳐다볼 수 없었지 너무 낭만적인 것을 너와 함께하면 벼락처럼 너를 사랑해 버릴까 봐 네가 나를 보고 등대처럼 웃었어 잠시 눈이 멀었던 것은 비밀로 할게 네가 무슨 말을 꺼낼 때 고래의 울음이 머리 위를 지나갔어 너는 내게 불멸처럼 사랑한다 했을까 누구도 믿지 않는 허구의 전설이 너라면 나는 질긴 목숨처럼 믿기로 했어 너는 옅은 거품처럼 사라졌나 꿈 안의 꿈으로 도망쳐버렸나 눈을 뜨니 너는 없고 베개에서 짠내가 났어, 창밖은 여전히 푸른 물로 가득 차 있었지 천 년도 아깝지 않은 .. 더보기
천국에도 가고 싶지 않아 거기서도 살아야 하니까 저번 여름에 죽을 거라고 말했던 사람으로부터 먼저 연락이 왔다 익선동에서 보자고 했다 그는 지근거리에 살고 있으면서도 익선동은 처음이라고 했다 가까워서 늦은 저녁에 만나 안부를 묻자 그가 대답했다 천국에도 가고 싶지 않아 거기서도 살아야 하니까 매미가 얼마나 길게 우는지 측정하기 위해 머리 위로 무언가가 지나가는 동안 생겨나고 있고 없어지고 있고 끊임없이 이야기하며 걸었다 좋은 곳들에 대해 지친 그는 처마 아래 쭈그려 앉아 손으로 이마를 가리며 눈을 찡그렸다 만둣집 앞에 사람들이 서 있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줄이어서 나는 다른 곳으로 가자고 했다 하얀 수증기 속에서 언뜻언뜻 생각나는 사람들 얼마나 기다려야 해요? 방금 도착한 사람이 종업원에게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천국이 우유 한 잔이라면 좋을 텐데 어떤.. 더보기
내가 나이지 않기를 나에게 빌고 있다 세수를 하면서 얼굴을 빌고 있다 내가 나이지 않기를 나에게 빌고 있다 기도가 얼굴에 드러나지는 않는다 하나의 기도를 가진 사람은 하나를 이루지 못하지만 수없이 간절한 나는 수없이 이루지 못한다 ​ 아직 빌지 못한 손이 이렇게 아직 모으지 못한 손이 저렇게 나는 손 둘 곳이 없어지고 두 손 사이에서 유발되는 기갈 기도를 줄여야 하지만 기도의 형식을 배우지 못했다 비는 게 많아 비린 무얼 빌고 있는지도 잊어버린 손은 그때 발이 된다 기도 아닌 애완이 되고 자신의 얼굴에 손발을 비비는 '완전한 개 자세'가 된다 비는 것이 내가 아니란 걸 알게 된다 누구의 손으로 빌고 있는지 무얼 빌고 있는지 그럴 마음은 없는데 온몸이 기도하고 있다 알아서 기고 있다 두 손은 떨어져 있는데 한 손으로 비는 것은 가능한지 다른 .. 더보기
수시로 나는 나를 만나지 못하고 잃어버리곤 해 그녀는 가끔 내게로 소풍 온다. 그녀는 그릇을 닦다말고 골목을 건조하게 바라보는 습관이 있다. 접시가 불안하게 매달린 손 끝으로 여름이 왔다. 죽은 잎과 산 잎을 모두 달고 있는 화분이 제 마음 기우는 쪽으로 넘어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쓴다. 말없이 눈만 깊어지는 오후. 그녀가 피는 담배 연기처럼 거대한 적란운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종일 선풍기가 방 안으로 돌아다녔으며, 도시엔 먼지처럼 모래가 흩어졌다. 숨을 곳이 여름밖에 없다면 믿을 수 있겠어? 그러니깐 뭐든 끝이 있지 않겠어요? 종일 라디오를 들었다. 창문 아래로 벽을 지나 온 물의 흔적이 벽지에 죽은 다알리아처럼 피었다. 수시로 나는 나를 만나지 못하고 잃어버리곤 해. 가만히 내 몸을 내려다볼 때 참 쓸쓸해. 골목 어디쯤을 휘청이며 걸어가는 내 마.. 더보기
오늘 우리는 나쁜 꿈속에 버려져 있는 것 같아 캄캄한 그 어디에서도 지금 잡은 내 손을 놓지마. 네가 실재하는 곳에 내가 있어야 해. 우린 불편한 영혼을 공유했잖아. 우리는 미래가 닮아있으니까. 나를 설명하지 않아도 되서 좋아. 주머니에 늘 수면제를 넣고 다니는 습관까지. 칼자국이 희미해지지 않는 자해의 흔적까지. 유령처럼 하얗고 작은 발가락까지. 비릿하고 나쁜 꿈을 꾸고 일어나면 온몸에 개미 떼가 기어 다니는 것 같아. 나쁜 게 뭘까. 좋고 싫은 건 있어도 착하고 나쁜 건 모르겠어. 근데 오늘 우리는 나쁜 꿈속에 버려져 있는 것 같아. 세상에 너하고 나. 둘 뿐인 것 같아. 가위로 우리 둘만 오려내서 여기에 남겨진 것 같아. 이런 게 나쁜 거야? 난 차라리 다행인데. 유서를 쓸 땐 서로 번갈아가면서 쓰자. 네가 한줄, 내가 한 줄. 이 개 같은 세..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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