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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중한 물의 몸, 고요한 심해의 눈빛 머리를 누르는 손에 대해 이야기한 적 있지. 육중한 물의 몸, 고요한 심해의 눈빛. 눈길 닿는 곳마다 분연히 어둠을 뿜어내는, 먼 먼 바다의 바닥. 그러나 바다는 바닥도 물의 입체도 아니었지. 바다는 다만 땅의 천장, 전구를 갈기 위해 길게 뻗은 손처럼 우리는 나란히 몸을 세우고 세상 가장 어둡다는 빛을 찾으러 갔었다. 가득히 입을 벌려 아직 남은 대기와 키스해. 오직 키스로만 인간은 말을 잊는다. 말을 버리고 입 속의 심해로 잠수해 들어가…… 그건 사람의 천장이거나 낮의 바닥. 지구가 껴입은 빛나는 외투의 안감. 몸속의 공기방울들이 급격히 팽창하고 안팎이 서로를 침범하는 자리에 대하여. 사람의 몸이 견뎌내야 하는 색(色)과 압(壓)의 연합군에 대하여. 이야기한 적 있지. 우리는 낯선 수면으로 떠올라. .. 더보기
옥상에 널어놓은 흰 빨래들이 밤새 별빛을 먹어 노랗게 말랐다 빛 하나 들여보내는 창(窓)이면 좋았다 우리는, 같이 살아야 같이 죽을 수도 있다는 간단한 사실을 잘 알고 있던 시절에 만났다 네가 피우다 만 담배는 달고 방에 불 들어오기 시작하면 긴 다리를 베고 누워 국 멸치처럼 끓다가 ‘사람이 새와 함께 하는 법은 새장에 새를 가두는 것이 아니라 마당에 풀과 나무를 키우는 일이었다’ 정도의 글귀를 생각해 너의 무릎에 밀어넣어두고 잠드는 날도 많았다 이불은 개지도 않고 미안한 표정으로 마주앉아 지난 꿈 얘기를 하던 어느 아침에는 옥상에 널어놓은 흰 빨래들이 밤새 별빛을 먹어 노랗게 말랐다 박준, 광장 더보기
눈을 감고 눈을 상상해 폭설이 난무하는 언덕에 서 있어 눈이 와, 여긴 함박눈이야 네 목소리를 듣고 별안간 난 한 번도 함박눈을 맞아보지 못한 걸 알았어 평범한 기쁨을 떠나 있는 것 같아 엄청난 사태로부터도 ​늙은 시인에게서 사랑 없는 일생을 살았다는 말을 들을 때처럼 싱거운 얘기지 눈을 감고 눈을 상상해 폭설이 난무하는 언덕에 서 있어 두 팔을 벌려야 해 입을 쫙 벌린 채 눈덩이를 받아먹어 함박눈은 솜사탕만 할 거야 네게 한 번이라도 함박눈이 되었으면 좋겠어 눈발이 거세지고 조금씩 나는 파묻혀가고 있어 난 하얀 구름이 되어 솜사탕처럼 녹아가네 눈은 죽은 비라고 루쉰이 그랬나? 네 얼굴에 내가 내리면 코가 찡하겠니? 나를 연신 핥으며 달콤해 아 달콤해 속삭일 거니? 나를 베개 하고 나를 안겠지 우린 잠시 젖은 후 흘러갈 거야 너무 싱거운 거 같아 망설인다면 .. 더보기
당신이 적막을 주었고 어떤 생이 남았다 맹세보다 가혹한 일기를 쓴다 그 여름 인생에 대해서 말할 수 있다 (당신은 쓸려갔고 다시 오지 않았다) 그 여름 슬픔에 대해 말할 수 있다 (당신이 적막을 주었고 어떤 생이 남았다) 강은 멀리서 소리를 낸다. 울 수 있는 것도 능력이다. 뒤집힌 채 강물 위로 떠오르는 물고기들은 마지막 방점을 찍는다. 누가 감히 물고기의 크기를 묻고 누가 물고기의 고향을 묻는가. 몰락을 마주할 때도 법도가 있다 부질없는 건 여행이다. 강을 보고도 여행을 가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는가. 갈 곳을 미리 알고 싶은가. 그곳이 정말 궁금한가. 그곳이 내 것인가 비는 일단 밤에 내리는 게 맞다 허연, 어떤 생이 남았다 더보기
내일은 아무 소용 없어요 모래 위에 적히지 못하는 파도만큼이나요 그어지면 그어질수록 나에게 밀리는 건 나 같아요 마시면 마실수록 우는 사람은 나 같아요 사실 우는 것 같은 기분만 느껴봤지 울어본 적 없어요 밀리면 밀릴수록 도착하게 되는 곳은 바다인데 그곳에 서면 선을 부르게 돼요 하지만 부르면 부를수록 우는 소리 같아서 참아야 해요 참으면 참을수록 얻어지는 건 내일이에요 내일만 몇 년째예요 내일은 아무 소용 없어요 모래 위에 적히지 못하는 파도만큼이나요 이원하, 마시면 마실수록 꺼내지는 건 더보기
어느 쪽이냐 하면 매몰되기를 바라는 편이었다 어느 쪽이냐 하면 매몰되기를 바라는 편이었다 위태해 보이는 산 아래에 쭈그리고 앉아 무너져라 무너져 수색대원들이 손전등을 들고 내 뒤를 왔다갔다했다 들키지 않았다 내가 더 진심이었으니까 ​ 들것에 실려 요란하고 따가운 사이렌의 이유로 밝혀질 때에됴 긴 쇠 집게가 모래 알갱이를 골라내어 살 속에서 하나씩 빼앗아갈 때조차 나는 들키지 않고 소란이 차려진 식탁 밑에서 혼자 김밥을 물은 없어도 꾸역꾸역 물의를 일으켜서 미안합니다 용서받고 싶을 땐 몰래 뒤로 가서 머리카락을 땋아 주었다 엄마 건 짧고 곱슬거려서 잘 안 됐다 스탠드 아래 건강한 팔다리를 늘어놓고 햇볕을 묻히고 노는 친구들 양 갈래로 땋은 머리 내가 말을 던지면 꼭 공이 던져진 것처럼 그 자리에 우뚝 번지는 긴장감 그래도 나는 계속 말 걸었다 물 있.. 더보기
슬픔에게서 재주가 늘어나는 것 같아 슬픔에게서 재주가 늘어나는 것 같아 녹슨 대문 앞으로 서성거리는 사람을 글썽거린다고 생각한 적 있었지 망설이던 말이 발을 절며 다가와 매일 낭떠러지에 있다고 나를 종용하고 이제 등에 몰두하자는 말을 했지 두 눈동자의 주름을 펼치며 바라보자고 했지 그러나 너무 많은 슬픔이 기성품이 되어 집에 돌아온다 누구나 붙잡고 말하게 되는 마른 헝겊이 모자란 세계로 출국하고 바닷바람 머금은 손수건을 선물하지 이 모르는 슬픔이 움직이는 이유를 잠깐 떠들고 싶다 비행운의 연기력처럼 포로의 잠꼬대를 닮은 위로만 해댔지 더이상 나눌 수 없는 슬픔은 등에 업고 가려고 해 그 끝이 어딘지 모르지만 헤멜수록 정확해지는 그 주소로 향하려고 해 슬픔의 묘기가 나를 흉내낸다 눈물을 훔치던 네가 어디까지 이야기했었는지 되묻고, 나는 처음.. 더보기
끊어진 말들은 어디서 어긋났을까 언젠가 이름도 없는 공원에 앉아 서로의 숨소리를 듣고 있었지 그때 우린 말이 없었지만 귀를 모으며 부자가 되었고 사랑니로 만든 목걸이를 차고 연인들은 철새처럼 흘러갔다 새 이빨을 다오 젖니가 빠지면 지붕 위로 던졌다는데 옛날이야기는 왜 슬픈 걸까 아기들이 울지 않아도 봄은 올 텐데 하얗게 눈 쌓인 지붕을 머리에 이고 무너질 것처럼 떠나지 못한 집들만 남아서 밤마다 하나씩 담이 헐리는 소리를 듣는다 낡은 이빨이 하나씩 떠나가듯 언젠가 간판도 없는 주점에 앉아 텅 빈 입으로 질긴 이야기를 씹어대겠지 누군가는 몸조차 가눌 수 없겠지만 더 토하고 싶습니까 등 뒤에는 주먹을 쥐고 다그치는 사람들 그건 끝이라는 뜻인데 단 한 발짝 떼지 않고도 떠나는 날이 오겠지 얼어붙은 두 발 사이로 쌓여 있던 마음만 눈사태처럼 ..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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