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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여름의 얼룩은 남아 당신의 여름을 떠올리게 하는 순간이다 당신은 갑자기 얼룩의 소용돌이고 지문이고 옛날의 유리창이다. 당신은 유리창이라는 단어보다 어떤 책의 제목인 유리문이라는 단어를 더 좋아했다 지금 창밖엔 귀뚜라미 울고 아직 여름의 얼룩은 남아 당신의 여름을 떠올리게 하는 순간이다. 당신은 모든 계절이었다. 당신은 그러나 점점 깊어지며 커지고 번지는 소용돌이로 다시 텅 비었다. 내가 당신을 너라 부르거나 당신이라고 부르거나 여보라고 부르거나 어떤 다른 이름으로 불러도 당신의 부재는 더욱 깊어져 이미 볼 수 없고 볼 수 없음으로 나와 함께 있다. 당신은 끈적거리고 더럽고 감미롭고 깨끗하고 부드럽고 질퍽거리며 떼어낼 수 없고 늪이고 죽음이고 또 사랑이고 그리움이다. 그리하여 당신은 끝내 여기에 없다. 당신의 웃음이 가라앉고 있다. 웃음의 반점을 남기며. 문득 .. 더보기
이번 삶은 천국 가는 길 겪는 긴 멀미인가요 팬티를 벗고 체중계에 올라가는 새벽입니다 그림자도 체중계 밖에서 기다려야 하는 새벽입니다 커다란 제사장이여 커다란 예언자여 이번 삶은 천국 가는 길 겪는 긴 멀미인가요 나를 체중계 위로 떠민 아비와 체중계 뒤 발을 걸친 천사들 덕분에 이곳은 지그시 가라앉고 있습니다 커다란 제사장이여 커다란 예언자여 나는 이리도 우연히 죄와 평행해도 되는 것입니까 주먹 속 일몰과 망토 안에서 기우는 추와 함께 체중계 위에서 저물면 안 되는 일입니까 커다란 심판자여 커다란 심판자여 가볍게만 마시고 흩어지게 하소서 성동혁, 속죄양 더보기
물속에 있으면 비를 잊을 수 있다 물속에 있으면 비를 잊을 수 있다 침대도 편지도 없고 마른 것도 없다 몸을 한껏 펼친다 머릿속에서 눅눅한 페이지들이 천천히 녹아내린다 물속은 가득 차 있다 물고기들이 제 몸속으로 음악을 삼키고 있다 배 속에 진회색 구름이 차오른다 물속에는 갈림길이 없다 잠길 수 있다 결빙이 없다 표정처럼, 얼음은 언제나 바깥부터 시작된다 목욕도 없다 가끔 숲이 있다 흔들리는 부드러운 나무들 물속에서는 옷장이 필요 없다 그 사이에서 물고기들은 헐벗거나 먹거나 마신다 말없이 그러나 물고기들은 음악을 풍기고 있다 수면이 얼어붙는 동안에도 풍만한 냄새로 가득 찬 움직이는 음표 물속에서 누군가의 뺨을 때릴 수 있었다면, 상대방이 멈추기로 결심했기 때문에 가능한 음악이 있다 물속에는 식탁이 없다 마주 볼 필요 없다 비명 없이 우리.. 더보기
뜨거움이 모자랄 때마다 나는, 발바닥인 것 같아 네가 올 때마다 육각형 눈이 와. 나는 여름 들판에서 너를 기다려. 하얀 벌들이 밤하늘을 뒤덮고, 나의 심장에도 차가운 눈이 내려. 너는 새벽에서 이곳으로 와. 빈방에서 여름으로 와. 그럴 때 너는 너보다 커 보이거나 작아 보여. 그림자놀이처럼. 침엽수에게 어떤 모양의 잎을 달고 싶으냐고 물으면 흰 왕관처럼 얹힌 눈이 녹아버릴까. 북쪽 여왕의 반대말은 북쪽 왕인가 남쪽 여왕인가 남쪽 허름한 소녀인가 소년인가. 이런 걸 궁금해하면 네가 화를 낼까. 담요를 드릴까요. 물어보면 네가 조금씩 녹을까. 녹으면서 허둥댈까. 너는 하얀 자동차를 타고 한 방향으로 가. 추위를 느끼지 못하는 나라로. 눈보라가 치고 침엽수가 자라는 빈방 속의 반방으로. 나는 옆구리나 심장으로 태어났으면 좋았을 거라고 생각할 때가 많아. .. 더보기
잘라내도 살아지는 생은 얼마나 진저리 쳐지는지 꼬리를 잘라내고 전진하는 도마뱀처럼 생은 툭툭 끊기며 간다 어떤 미련이 두려워 스스로 몸을 끊어내고 죽은 나를 돌아보지도 않고 스스럼이 없나 한 몸의 사랑이 떠나듯 나를 떠나보내고 한 몸의 기억이 잊히듯 나를 지우고 한 내가 썩고 또 한 내가 문드러지는 동안 잘라낸 마디마다 파문같은 골이 진다 이 흉터들은 영혼에 대한 몸의 조공일까 거울을 보면 몸을 바꾼 나는 나를 알아보지 못 하고 무언가에 잘려나간 자리만 가만가만 만져보는 것이다 심장이 꽃처럼 한 잎 한 잎 지는 것이라면 그런 것이라면 이렇게 단단히 아프진 않을 텐데 몸을 갈아입으면 또 한 마음이 자라느라 저리는 곳이 많다 잘라내도 살아지는 생은 얼마나 진저리 쳐지는지 수억 광년을 살다 터져버리는 별들은 모르지 흉터가 무늬가 되는 이 긴긴 시간 동안 .. 더보기
온 힘을 다해 살아내지 않기로 했다 온 힘을 다해 살아내지 않기로 했다. 꽃이 지는 것을 보고 알았다. 기절하지 않으려고 눈동자를 깜빡였다. 한 번으로 부족해 두 번 깜빡였다. 너는 긴 인생을 틀린 맞춤법으로 살았고 그건 너의 잘못이 아니었다. 이 삶이 시계라면 나는 바늘을 부러뜨릴 테다.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처럼 하염없이 밥을 먹을 테다. 한 그릇이 부족하면 두 그릇을 먹는다. 해가 떠오른다. 꽃이 핀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울고 싶은 기분이 든다. 누구에게도 말 못 하고 주기도문을 외우는 음독의 시간. 지금이 몇 시일까. 왕만두 찐빵이 먹고 싶다. 나발을 불며 지나가는 밤의 공벌레야. 여전히 너도 그늘이구나. 온 힘을 다해 살아내지 않기로 했다. 죽었던 나무가 살아나는 것을 보고 알았다. 틀린 맞춤법을 호주머니에서 꺼냈다. 부끄러.. 더보기
[고래와 나] 그라폴리오에 올리는 두번째 그림! 그라폴리오에 올리는 두번째 그림! 저번에는 소녀를 그렸으니까 이번에는 소년을 그리고 싶었다 밤산책을 하던 소년이 우연히 하늘에서 내려온 달을 만났다...라는 설정이다 https://grafolio.naver.com/works/1817005 소년과 고래 어느날 밤, 하늘에서 달이 내려왔다 grafolio.naver.com 그림 그리면서 어려웠던 점 1. 머리카락 그리기가 너무 어려웠다 한올한올 그려야할지... 아니면 전체적인 윤곽을 잡아야할지... 머리카락 굵기는 어느정도로 해야할지... 가르마 방향은 도대체 어디인 것이며... 아직은 너무 부족한 실력 2. 명암 넣는게 너무 어렵다 빛이 오는 방향...? 그런거 아무리 생각해봐도 잘 상상이 안된다 그래서 어림짐작으로 그려버렸는데 계속 흐리기로 명암 뭉끄러..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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