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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 글귀 & 대사

삿포로에 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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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과 12월 사이를 좋아합니다. 그건 당신을 좋아한다는 말입니다.

조금씩 눈비가 뿌리고 있으니 어쩌면 잠시 후에 눈송이로 바뀌어 이 저녁을 온통 하얗게 뒤덮을지도 모르니 이곳 강변의 여관에서 자고 가기로 합니다. 창문을 열어놓고 맥주를 한 병 마시는데 몸이 술을 마시지 말라고 하네요. 이야기할 사람이 없으면 술을 마시지 말라고 몸이 말을 걸어 옵니다. 그럼요, 술은 정말정말 좋은 사람이랑 같이 하지 않으면 그냥 물이지요. 수돗물.

언제였던가요. 덕유산에서 삼 개월을 여행자로 지낸 적이 있는데 매일매일 폭설이었고 나 또한 매일매일 눈사람이었습니다. 그 시간, 나는 모든 것을 받아들일 준비를 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어요. 인생의 진하디진한 어떤 예감 같은 거요. 그 후로 나에게 생긴 병이 있다면 눈을 찾아 자주 길을 나선다는 것. 누군 병이라지만 그렇게 나쁘지만은 않은 병이겠죠.
매일매일 폭설을 기다리다 드디어 폭설을 만났습니다. 요즘 저의 근황을 이야기하자면 매일매일 폭설 중이라는 겁니다. 이리도 폭설 중인데 무엇이 저를 일으켜 세울 수 있을까요. 폭설이 두 눈으로 들이치는데 어떻게 한발짝이라도 나아갈 수 있을까요. 놀랍네요, 이런 기적들이, 괜찮네요.

우리 천 살까지 만나 살까요. 그러면 어떨까요.

이러면 어떨까요. 모두를 던지는 거예요.
그 다음은 그 이후의 모두를 단단히 잠그는 거예요.

삿포로에 갈까요. 멍을 덮으러, 열을 덮으러 삿포로에 가서 쏟아지는 눈발을 보며 술을 마실까요. 술을 마시러 갈 땐 이 동네에서 저 동네로 스키를 타고 이동하는 거예요. 전나무에서 떨어지는 눈폭탄도 맞으면서요. 동물의 발자국을 따라 조금만 가다가 조금만 환해지는 거예요.
하루에 일 미터씩 눈이 내리고 천 일 동안 천 미터의 눈이 쌓여도 우리는 가만히 부둥켜안고 있을까요.
미끄러지는 거예요. 눈이 내리는 날에만 바깥으로 나가요. 하고 싶은 것들을 묶어두면 안 되겠죠. 서로가 서로에 대해 절망한 것을 사과할 일도 없으며, 세상 모두가 흰색이니 의심도 서로 없겠죠. 우리가 선명해지기 위해서라기보다 모호해지기 위해서라도 삿포로는 딱이네요.
당신의 많은 부분들. 한숨을 내쉬지 않고는 열거할 수 없는 당신의 소중한 부분들까지도. 당신은 단 하나인데 나는 여럿이어서, 당신은 죄가 없고 나는 죄가 여럿인 것까지도 눈 속에 단단히 파묻고 오겠습니다.

삿포로에 갈까요.
이 말은 당신을 좋아한다는 말입니다.


이병률,『바람이 분다 당신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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