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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쪽이냐 하면 매몰되기를 바라는 편이었다
위태해 보이는 산 아래에 쭈그리고 앉아
무너져라
무너져
수색대원들이 손전등을 들고 내 뒤를 왔다갔다했다
들키지 않았다
내가 더 진심이었으니까
들것에 실려
요란하고 따가운 사이렌의 이유로 밝혀질 때에됴
긴 쇠 집게가 모래 알갱이를 골라내어
살 속에서 하나씩 빼앗아갈 때조차
나는 들키지 않고
소란이 차려진 식탁 밑에서 혼자 김밥을
물은 없어도 꾸역꾸역
물의를 일으켜서 미안합니다
용서받고 싶을 땐 몰래 뒤로 가서
머리카락을 땋아 주었다
엄마 건 짧고 곱슬거려서 잘 안 됐다
스탠드 아래 건강한 팔다리를 늘어놓고 햇볕을 묻히고 노는
친구들
양 갈래로 땋은 머리
내가 말을 던지면 꼭 공이 던져진 것처럼
그 자리에 우뚝 번지는 긴장감
그래도 나는 계속 말 걸었다
물 있니
불 빌려줘
너희들의 생수 병에 꽂혀 있는 건
한때 나를 거절했던 사람
의 친구들
의 친구들까지 사용했던 빨대
내 이야기를 빌려 화목했던 사람들은
나와 마주쳐야 할 그때에
어떤 색깔로 어색해하는가
또는 한치의 거리낌이 없이 환한가
아무것도 모르고 종이컵을 많이 샀다
나눠주고 나눔받을 것을 믿었다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은 컵을
나는 다닥다닥 이로 물어뜯었다
어느 쪽이냐 하면
체육대회를 좋아하는 쪽
운동신경이 괜찮은 편이었답니다
등산을 하러 가서 마치 해냈다는 듯이
땀 흘리고 웃고 내려다보았으나
모두 썩지 않고 당당하게 묻혀 있다고
비 오는 밤 피부를 뚫고 나온 지렁이들이 일러주었다
신이인, 안 죽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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