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을 믿어?
빛에 마구 섞여 드는 빛 입자에서
감아도
떠도 마찬가지인 두 눈 속에서
잠보다 조용히 떠다니는
얼음 조각 위에서
지친 채 커져 버린 사랑을 믿어?
숨을 헐떡이며 돌아온 너는 들려줄 말이 있다고 했지. 태양 빛이 조금 지워 버린 너의 귀는 오래전 우리가 심었던 나무 아래서도 꽁꽁 얼어붙어 있었어. 조그맣고 슬픈 고집처럼, 어설픈 가장자리처럼. 알 수 없는 미래처럼. 너는 가방에서 윤기나는 솔방울 여럿을 꺼내 자랑스레 돗자리에 늘어놓았다.
이건 꿈, 이건 바다, 이건 혼란, 이건 절벽, 이건 플라스틱, 이건 검정, 이건 대통령, 이건 무지개, 이건 건총, 이건 테이블, 이건 기쁨, 이건 침묵, 이건 모서리, 이건 시위대, 이건 용기…… 솔방울 한 알이 이토록 가볍고 평평하고
시시한 우주라니 나는 네가 ‘이건 사랑……’ 말하지 않기만을 바랐고
손을 뻗어 차가운 네 귀를 매만졌지.
너뿐인 너
솔방울이 솔방울을 제대로 부르고 만져 보기도 전에. 놀이하듯 갖거나 내팽개치기도 전에.
빛을 받아 반짝이는
한 무더기의 세계가 너무 추워 보여.
이 숲과 저 숲
저 숲과 이 숲을 잇는 꼭짓점은 자꾸 옅어지기만 하고
나뭇가지를 지우며
우리의 손등에 골고루
천천히 내려앉는 동안
네 귀는 전혀 다른 생물이 되어 가는 것 같았어.
*
믿어?
엉망진창 뻗친 호수
투명한 냉기가 이토록 빽빽하게 심긴 숲속에서
윤곽도
과거도 미래도 가늠할 수 없는 수면 위에서
부서진 귓바퀴
규칙적으로
젖는 소리
가장자리의 가장자리
슬픔 옆의 슬픔처럼
네 옆에 눕는다
*
이건 곡선, 이건 부드러움, 이건 파도, 이건 파랑, 이건 별, 이건……
일관성 있는 우주는 폭발 직전 한 번씩만 있어서
귀밑 솜털이
수면이
거짓말처럼 흔들려.
사람의 몸이 종이처럼 접히지 않는다는 사실이 얼마나 다행인 일일까. 잠들었을 때 누가 꼬챙이를 집어넣어 울음을 꺼내면 아코디언 모양으로 접혀져 있을 거야. 그만큼의 소리도 못 내면서, 찢어지지도 못하면서.
느끼지 못하는 살갗에도 작은 소용이 있는 걸까?
파도가 부푼다
보채는 빛 속에서
어둠 속에서
*
믿을 수 있어?
차츰차츰 멀어 가는 귀
떠다니는 얼음 조각
입술과 입술
마음과
마음이
잠시 붙었다
떨어지는 소리
무더기 언어
섞이는 하양
기적 없이 사랑을 말하는
투명하고 시끄러운 희망
김연덕, 빙하의 빛 또는 가끔가끔 진짜일 수 있었던 빙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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