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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연

사랑을 호명할 때 우리는 거기에 없었다 月, 당신은 장을 보러 나갔다 잘게 썰린 해파리를 사와서 찬물로 씻었다 베란다에선 파꽃이 피었고 달팽이는 그 위에 둥글게 앉아 있었다 火, 당신은 나를 차마 깨우지 못했다 똬리를 틀고 잠든 나의 테두리를 동그랗게 에워싸며 조용히 다가와 다시 누웠다 水, 당신은 기차를 탔다 덜컹이기 위해서 창문에 이마를 대고 매몰차게 지나가는 바깥풍경을 바라보기 위해서 나는 옥상에 의자를 내놓고 앉아 있었다 눈을 감고 귀를 깃발처럼 높이 매달았다 여린 기차 소리가 들렸다 木, 사랑을 호명할 때 우리는 거기에 없었다 서로가 서로에게 사나운 짐승이 되어 있었다 동시에 서로가 서로에게 초식동물이 되어 있었다 두려움에 떨었다 당신의 떨림과 나의 떨림 사이에서 시뻘건 피가 흘렀다 우리가 나누었던 대화들이 응혈처럼 물컹 만져졌다 金.. 더보기
나는 아무것도 제대로 손에 쥔 적이 없어서 잃을 것도 없지만 온통 잃어버린 것투성이인 것 같은 사람이다 친구는 살아오면서 잃은 것에 대해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고, 나는 잃은 것에 대해 말할 게 없는 사람이다. 친구는 잃었다는 상실감이 충격이 될 만큼 무엇을 가진 적이 있던 사람이고, 나는 아무것도 제대로 손에 쥔 적이 없어서 잃을 것도 없지만 온통 잃어버린 것투성이인 것 같은 사람이다. 김소연, 『시옷의 세계』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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