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728x90

작가

안녕, 여기는 잊혀진 별 명왕성이야 안녕, 여기는 잊혀진 별 명왕성이야. 여기 하늘엔 네가 어릴 때 바닷가에서 주웠던 소라 껍데기가 떠 있어. 거기선 네가 좋아하는 슬픈 노래가 먹치마처럼 밤 푸른빛으로 너울대. 그리고 여기 하늘에선 누군가의 목소리가 날마다 너를 찾아와 안부를 물어. 있잖아, 잘 있어? 너를 기다린다고, 네가 그립다고, 누군가는 너를 다정하다고 하고 누군가는 네가 매정하다고 해. 날마다 하늘 해안 저편엔 콜라병에 담긴 너를 향한 음성 메일들이 밀려와. 여기 하늘엔 스크랩된 네 사진도 있는걸. 너는 낯선 사람들 사이에서 웃고 있어. 그런데 누가 넌지 모르겠어. 누가 너니? 있잖아, 잘 있어? 네가 쓰려다 지운 메일들이 오로라를 타고 이곳 하늘을 지나가. 누군가 열없이 너에게 고백하던 날이 지나가. 너의 포옹이 지나가. 겁이 .. 더보기
최대치의 행운이 너였고, 최고치의 불행은 너의 부재였어 그런 거 있지. 정말 별 게 아닌데 별거처럼 버릴 수 없던 것들. 새로 사면 되는데도 이거여야만 한다고 고집하던 거 있잖아. 누군가에겐 징크스일 수도 있고, 또 어떤 사람에겐 행운의 부적이라 여겨지는 존재들. 뭐랄까. 하나 남은 담배는 태우면 안 된다고 말하거나 매일 하는 팔찌인데도 하루의 운세를 이끌어줬다고 믿게 되는 거. 상황에 사물을 대입해서 철석같이 믿거나 아니면 그 결정을 한 나를 대신해 신랄하게 욕할 수 있었던 것들. 너는 그런 사람이었어. 내가 우연히 잡은 행운인데도 네가 곁에 있었기 때문이라고 믿었고, 내 실수로 망쳐버린 일이었지만 네가 내 옆이 아닌 현실 때문이라 생각했어. 너는 내 징크스, 행운의 부적, 세상에서 가장 좋은 것이 뭐냐고 물으면 네가 먼저 나올 정도로 내 세계에서 너는 내.. 더보기
그래 우리는 만져줄수록 흐려지고 미천해지는 병에 걸렸어 파문이 시작되는 곳에 두 개의 원이 있었다. 테를 두르며 퍼져 나가는 동그라미 동그라미들. 너와 나는 끊임없이 태어나는 중인 것 같아, 물속에 오후를 담그고 우리의 방(房)은 빛나는 모서리를 여럿 매달았다. 수면을 향해 아무리 불러도 충분하지 않은 노래였고, 그저 유영하기 위해 한껏 열어둔 아가미였지. 그래 우리는 만져줄수록 흐려지고 미천해지는 병에 걸렸어. 투명한 벽에 이마를 짓찧으며 여러 날을 낭비했었다. 단단한 눈물을 흘렸고, 얼굴이 사라지는 대신 아름답게 구부러진 다리를 얻었다. 유리 너머로 흐르던 색들이 우리 몸에서 묻어난다. 짧고, 하얀 소리가 났다. 이혜미, 물의 방 더보기
엄마, 사다리를 내려줘 엄마, 사다리를 내려줘 내가 빠진 우물은 너무 깊은 우물이야 차고 깜깜한 이 우물 밖 세상으로 나가고 싶어 박성우, 보름달 더보기
삶을 취미로 한 지 오래되었다 기지개를 켠다 창밖 길 건너 장례식장은 불이 꺼졌다 몸이 추처럼 무거운 건 아무래도 익숙해지지 않는 울음소리가 젖은 신문지처럼 꿈에 들러붙었기 때문 흙갈이를 해줘야지 생각한 지 서너 해가 되었는데 밤새 화분 위로 낯모르는 색이 피었다 전화를 걸어야 했는데 주전가 물 끓는 소리에 그만 어제인 듯 잊었다 "한 발은 무덤에 두고 다른 한 발은 춤추면서 아직 이렇게 걷고 있다네." 검은 나비들이 쏟아져나온다 미뤄뒀던 책을 펼치자 창을 넘지 못하는 나비들, 그 검은 하품을 할 때, 느른한 음색 속에 등걸잠 같은 생이 다 들었다 나는 살고 있고, 내가 살아가도록 내버려두었다 삶을 취미로 한 지 오래되었다 *에두아르도 갈레아노,「시간의 목소리」 이현호, 오래된 취미 더보기
밖에를 못 나가겠어 길 가다 차가 오면 뛰어들고 싶어지니까 "밖에를 못 나가겠어. 길 가다 차가 오면 뛰어들고 싶어지니까. 누가 날 때려줬으면 좋겠어. 욕해줬으면, 아니 죽여줬으면 좋겠어. 나의 고통을 끝내줬으면 좋겠어. 근데 다들 내 탓 아니라고 위로만 해. " 김사과, 『천국에서』 더보기
온통 젖은 채 전부가 아닌 건 싫다고 영혼이 아프다고 그랬다. 산동네 공중전화로 더이상 그리움 같은 걸 말하지 않겠다고 다시는 술을 마시지도 않겠다고 고장난 보안등 아래서 너는 처음으로 울었다. 내가 일당 이만오천원짜리 일을 끝내고 달려가던 하숙촌 골목엔 이틀째 비가 내렸다. 나의 속성이 부럽다는 너의 편지를 받고 석간을 뒤적이던 나는 악마였다. 십일월 보도블록 위를 흘러다니는 건 쓸쓸한 철야기도였고, 부풀린 고향이었고, 벅찬 노래였을 뿐. 백목련 같은 너는 없다. 나는 네게서 살 수 없었는지도 모른다. 아침에 일어나면 떨리는 손에 분필을 들고 서 있을 너를 네가 살았다는 남쪽 어느 바닷가를 찾아가는 밤기차를 상상했다. 걸어서 강을 건너다 아이들이 몰려나오는 어린 잔디밭을 본다. 문득 너는 없다. 지나온 강 저쪽은 언제나 절망이었으므로. 잃.. 더보기
꿈의 페달을 밟고 너에게 갈 수 있다면 시시한 별들의 유혹은 뿌리쳐도 좋았다 내 마음 저 달처럼 차오르는데 네가 쌓은 돌담을 넘지 못하고 새벽마다 유산되는 꿈을 찾아서 잡을 수 없는 손으로 너를 더듬고 말할 수 없는 혀로 너를 부른다 몰래 사랑을 키워온 밤이 깊어가는데 꿈의 페달을 밟고 너에게 갈 수 있다면 시시한 별들의 유혹은 뿌리쳐도 좋았다 최영미, 꿈의 페달을 밟고 더보기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