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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이 새어든다. 너를 본다. 너를 비추는 햇빛을 본다. 너의 어깨 너머로 흐르는 구름을 본다. 구름 속 석양을 본다. 석양 속 코끼리 무리를 본다.
너를 본다. 너의 눈동자 속에 비친 내 얼굴을 본다. 그림 안과 밖에서 서로를 마주 보는 심정으로 너를 본다. 우리의 간격을 본다. 네 얼굴을 만진다. 형상은 온기로 잡힌다. 한 번도 부화한 적 없는 심장을 품고 너를 만진다. 잠든 너의 심장을 본다.
거대한 것들의 죽음은 거대해서 작은 것들의 죽음은 작아서 슬프다.
코끼리는 마음이 너무 아프면 죽을 수 있다고 말하던 너의 입술을 본다. 나는 슬픔 속에 죽어가는 코끼리를 본 적 없지만
너를 통과해 빠져나가는 붉은 코끼리를 본다. 그 코끼리가 너의 그림자를, 나의 그림자를 지고 멀어져 가는 것을 본다.
너를 본다. 모래사장을 걷는, 바다를 걷는 너를 본다. 잠기는 두 발목을 본다. 바다로 밀려온 작은 새를 그것을 건져 올리는 너의 손목을 본다. 너의 어깨 너머로 흐르는 어둠을 어둠 속의 빛을 그 속에 저물어가는 너를 본다. 너를 보면 네 안에 문이 있고 노래가 있고 너를 바라보는 내가 있다. 내가 있다.
정다연, 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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